처음 진지하게 축구를 본 것은 1994년 미국 월드컵이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정확한 기억은 없다. 태어나서 처음 국가 대표 축구를 본 것이었고, 그저 분한 마음 뿐이었다. 같은 조에 스페인과 독일이 있었으니,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분할 일은 아니었는데, 그 때는 우리나라가 진다는 것이 그저 분하기만 했었다.
미국 월드컵 이후에 축구는 어린이들 사이에도 인기가 좋아졌다. 중학교 1학년 입학과 동시에 1학년만 자유팀을 꾸려서 하는 축구 대회가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신기한 일이다. 이런 일은 잘 없지 않나? 아무튼 생각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같은 반 아이들과 이 축구 대회에 나갔다. 나는 그 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축구를 해봤다. 나에게 공이 날라왔고, 어떻게 해야 할 지 몰랐던 나는, 공을 손으로 잡아버렸다. 그리고 교체된 것 같다. 그대로 집에 온 나는 그 이후 경기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3년 정도 이불킥을 한 것 같다.
이후 중/고등학교를 다니며 가끔 축구를 했지만, 우선 공을 제대로 트래핑하지 못했고, 슛을 하면 공이 하늘로 날라가거나, 땅에 굴러갔다. 그리고 친구들도 대부분 농구를 좋아해서 농구만 했다. 사실 축구가 더 좋았지만, 축구를 배울 기회도 없었고, 할 기회도 별로 없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이 있었다. 1무 2패로 조별 예선에서 탈락. 이 때는 분한 마음도 없었다. 월드컵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결승에서 프랑스가 승리했다. 또래들 사이에서 프랑스팀과 지단의 인기가 높았다.
대학교 2학년이 되었을 때는 2002년 한일 월드컵이 있었다. 당시에 나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좋지 않은 상태에서 별 생각 없이 잉글랜드와의 평가전을 보고 있었다. 우리나라가 월드컵 직전의 평가전에서 잉글랜드와 비겼다. 지금까지의 월드컵과는 다른 코스였고, 경기 내용이 매우 좋았다. 해당 경기를 보고 우울증에서 조금씩 해방되기 시작했다. 물론 약빨이 있었을 것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은 정말 대단했다. 최초로 홈에서 열린 월드컵에 4강까지 갔으니, 그 임팩트는 코로나19급이었다. 코로나 시즌처럼 길지는 않았지만, 그때 한번 우리나라는 크게 변화했다.
그 다음 축구에 관한 기억은 2003년 11월, 군대에서 자대 배치를 받은 뒤에 자대의 신병 훈련소를 다녀오고 난 후의 주말이었다. 발바닥은 다 물집 투성이었고, 제대로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몸 상태가 좋지 않았었다. 고참이 축구를 하러 가자는 이야기에, 그냥 따라 나섰다. 힘든 훈련을 마친 뒤라서, 축구가 힘들어봐야 별 거 없다는 생각이었다. 두려움이 없었다. 그렇게 축구를 하다가 공이 다가오길래 하늘 높이 개발슛을 했더니 공이 하늘로 치솟다가 떨어지면서 골인이 됐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 두번째 골을 넣고, 또 가만히 놔두면 들어가는 골을 건드려서 세번째 골을 넣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것도 뽀록으로, 해트트릭을 한 것이다. 기분이 참 좋았다. 그 이후 가끔 군대에서 축구를 하고 골도 가끔 넣었지만, 축구의 전술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센터포워드, 윙포워드,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수비형 미드필더, 중앙수비수, 윙백 이런 개념과 포백과 쓰리백의 차이, 쓰리톱과 투톱, 원톱의 차이, 수비형미드필더가 2명일 때와 1명일 때 등 다양한 전술에 대한 시야가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아쉬운 일이다. 알았다면 좀 더 잘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후 별 다른 일이 없다가 2004년 봄 정도에 소대(?)별 축구 대항전이 있었다. 1등은 11명, 2등은 8명, 3등은 5명에게 4박 5일의 휴가를 주는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꽤 많은 게임이 있었고, 이 중에 한 3게임 정도에는 출전했던 것 같고, 나머지 게임에는 참여하지 못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운동 능력은 꽤 괜찮았고, 속도는 빨랐다. 하지만 전술을 모르고, 개발이었다. 그래서 당시 감독을 맡았던 고참이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리그전은 그래도 꽤 괜찮은 리그전이었다. 우리 팀은 4등을 했다. 내가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아쉽게 졌던 마지막 경기가 기억이 난다. 참 운치있었다.
2005년 군대 전역 전에 내무실의 분대장이 되어 잠시 감독을 맡은 적이 있었다. 아쉽게도 여전히 난 축알못인 상태였다. 열심히 했으나 팀은 계속 패했고, 곧 축구 자체를 그만하게 되었고, 2005년 9월에 전역하게 되었다.
군대 전역 후에 피파온라인이라는 게임이 출시되고, 웃기게도 피파온라인을 통해서 축구의 많은 부분을 알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피파(지금의 FC)”라는 게임을 했다면 축구에 대한 이해가 깊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지성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있었다. 학생 신분이라서 시간이 많았기 때문에 새벽에 박지성 축구를 많이 봤다. 출전도 불투명한데, 출전하면 가끔 2골씩 넣고 그랬었다. 정말 짜릿하게 재미있었다. 지금의 손흥민과는 느낌이 조금 다르다. 박지성은 안정감이 어마어마했다. 만약 이번 아시안컵에 젊은 박지성이 있었다면, 감독이 뭔 짓을 해도 무조건 우승했을 것이다. 어디에 둬도 그 지역에 대한 지배력이 엄청나다. 박지성 축구는 재미있었다. 멋진 선수이다. Unsung hero였고, 월드클래스였다. 그 포지션이 특이해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전역 후 2006년에 월드컵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우리나라의 경기장에서 응원을 하며 봤다. 이때까지는 그렇게 경기장 같은 곳에 모여서 월드컵을 함께 보는 문화가 있었다. 우리나라는 정말 아쉽게 16강에 오르지는 못했다.
2007년에 대학교 4학년 과정을 인도에서 보내게 되었다. 그 때 한국 사람들이 하는 조기 축구 경기에 한 번 참여하게 되었다. 10분에서 15분 정도 출전했고, 오른쪽 윙백을 봤다. 아쉽게도 별로 잘하지는 못했다. 그 게임이 내 인생에 얼마 없었던 축구 경기 중 마지막이었다.
박지성 경기는 박지성이 2014년 은퇴할 때까지 챙겨봤고, 이후에는 손흥민이 나오는 경기의 하이라이트만 보는 수준으로 변했다. 풀타임으로 보는 것은 국가 대표팀의 월드컵, 아시안컴, 아시안게임, 올림픽 등과 같은 경기들만 보게 되었다. 축구 게임은 2020년까지 조금씩 하다가, 2020년에 접게 되었다.
이번 아시안컵 축구를 보다가, 내 인생이 축구와 전혀 관계가 없는데, 이래저래 축구에 참 많은 시간을 쓴 것 같아서, 간단히 글을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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