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하고 있는 일을 시작한 지 10년째 되는 때이다. 기념으로 나 자신을 중심으로 지난 20년을 간단하게 기록해보았다. 완성된 글은 아니고, 그냥 필요에 의해 남기는 글이다. 계속 수정하겠지만 완성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완성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다.
[선사시대]
2000년, 20년 전에 나는 고등학교 3학년이었고 매우 가난한 집의 외아들이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무척 친절한 부모님 덕분에 가난을 잘 모르고 자랐던 것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 화장실이 밖에 있는 11평 정도의 작은 월세 집에 살면서도, 더 잘 살고 있는 다른 이들을 불쌍히 여길 정도로 가난을 잘 몰랐다. 아마도 집과 나를 철저하게 분리하고 살았던 것 같다. 집은 집이고 나는 나라고 그렇게 믿고 살았던 것 같다. 그렇게, 어려운 형편에도 나는 이상할 정도로 행복하게 성장할 수 있었다. 가난을 딛고 행복했던 것이 아니라 가난하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렇게 성장한 것은 확연한 장단이 있지만, 나는 언제나 내가 좋다. 이런 방식으로 키워주신 부모님께 늘 감사하다.
[군대이전 시즌 2001 ~ 2003.09]
고등학교 수능이 끝나고 엄청나게 낮은 점수로도 꾸역 꾸역 집에서 아주 멀리에 있는 좋지도 않은 한 대학교에 운이 좋게 합격했다. 아빠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나에게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겠냐고 물으셨다. 그날, 나는 펑펑 울었다. 나는 너무 어리석었다.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고 다른 무언가를 한다는 것이 두려웠고, 프로그래머의 꿈을 위해 달릴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다. 물론 아빠는 자식에게 한없이 헌신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다시는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지방에 자취방을 마련해 주고 그곳에서 공부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나의 부모님께서 어떤 부분을 보고 나를 믿은 것인지 지금도 잘 알 수가 없다. 한없이 여린 19살 아들의 결정을 믿은 것일까? 아니면 너무 여리기에 어쩔 수 없었던 것일까? 어쨌거나 이 수능 점수에 의한 대학 입학과 함께 나의 비루한 삶은 시작되었다.
이후 2년간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대학교에 다녔다. 집에서 멀리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너무 부끄러웠다.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며 2년을 보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대학교는 집에서 멀리 있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학교였던 것 같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너무 부끄러웠고, 아쉽지만 지금까지도 좋게 기억되지는 않는다. 그 당시를 생각해보면 패닉의 “달팽이”만 생각난다. 그 노래를 듣고 또 들었다. “언젠가 먼 훗날에~ 저 넓고 거친 세상 끝 바다로 갈 거라고~~”. 비루한 현실에도 희망은 있었나 보다.
2001년 1학년 때에는 공부를 하지도 않았고 놀지도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고 학교와 집을 왕복하며 그저 삶을 이어갔다. 이 때, 유일하게 했던 일은 친구와의 전화통화였다. 당시에 휴대전화비용은 비쌌기 때문에 집 전화를 사용했는데 시외 전화요금이 한달에 20 ~ 30만원씩 나올 정도로 통화를 길게 했다. 한 6개월 정도를 그 통화로 지냈던 것 같다. 이 때 그와 한 이야기는 주로 여자, 패션과 그 친구의 비하인드 스토리였다. 여자와 패션은 그 나이에 자연스러운 이야기였지만 그 친구의 비하인드 스토리는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이 비하인드 스토리는 길지만, 결국 이 친구가 나에게 얘기했던 것은 ‘노력’이었다. 나는 이 때 처음으로 진짜 ‘노력’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노력’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노력’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 전에는 몰랐다.
- 훗날, 이 시절 덕분에 얻은 장단점이 있는데, 장점은 ‘노력’을 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단점은 스스로를 과도하게 낮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충분한 노력이 없이 살게 되면 스스로를 너무 비난하게 되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는 것인데 말이다.
2002년 2학년 때부터는 편입 준비만 했다. 없는 형편에 편입 학원까지 다녀가며 되지도 않는 영어 공부를 했다. 아무리 해도 효과가 없었다. 21살 때에도 고등학교 시절과 마찬가지로, 공부하는 방법을 전혀 몰랐다. 2학년 1학기 말부터 신경증을 겪었다. 당시에는 신경증이라고 진단을 받았는데 최근 들어 당시 겪었던 증상이 공황장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공황발작이 있을 때면 심장이 터질 것 같이 뛰어서 방바닥에 누워서 가만히 있게 되고 잠이 오기만을 기다리게 된다. 자는 시간이 유일하게 편해지는 시간이었다. 삶 전체가 암울해졌다. 물론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의 상황 자체가 암울한 것이 아니라 나 스스로 그렇게 만든 것이다.
- 지금은 어떤 정신적인 문제는 없지만, 지금까지도 저 세계에서는 완전하게 제대로 빠져나오지는 못한 것 같다. 어리고 여린 내가 만든 그 세계에서 말이다. 나는 여전히 그 세계에 있고, 그 세계에서 성공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것은 많은 단점들을 파생시킨다. 빠져나올 방법을 모르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의 짜릿함과 나의 오랜 친구들은 신경증으로부터 나를 조금 해방시켜주었다. 그 이후에도 우울함은 가득했으나, 공황발작은 겪지 않았던 것 같다. 이는 일상생활이 가능함을 뜻했다. 이렇게 꾸역 꾸역 집에서 아주 멀리 있는 대학교에서 2학년을 마쳤고 바로 휴학했다. 편입 조건을 완전하게 갖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에도 하나 정도는 얻은 것이 있다. 유일하게 정보기기에 몰입되어 있었다. MP3플레이어와 전자사전, PMP 등 각종 전자기기들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다. 없는 형편에도 셀빅XG이라는 PDA를 전화기로 사용했고, 프리즘이라고 불리우는 아이리버의 초창기 MP3플레이어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제품들을 바라보며 현재의 스마트폰을 생각했었고, 새로운 디지털 기기를 만드는 것을 꿈꿨다. 물론 이후에 디지털 기기들은 급격하게 발달했고 나는 그 중심이 아닌 가장자리에도 설 수 없었지만, 다만 이 디지털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는 가질 수 있었다. 이 시간 덕분에 지금의 이 세상을 잘 느낄 수 있다. 이 것이 유일하게 내가 얻은 것이었다. 내가 중학교 2학년부터 꿈꿔왔던 건 프로그래머가 아니라 이런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 물론 꿈을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진짜 원하는 것이 개발자가 아닌, 좀 다른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다. 그 직업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직업이며, 이룰 수 없는 큰 꿈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후 2007년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 키노트를 했을 때, 그 직업이 세상에 존재하는 직업이라는 것을 알았고, 내 꿈은 그처럼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많이 늦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그가 빨랐다. 내가 이루기에는 과도하게 어려운 꿈이었다.
2003년, 학교를 휴학하고 22살이 되었다. 군대에 갈 엄두는 나지 않았기 때문에 여름까지 반년동안은 더 편입 공부를 하게 되었다. 우리 집은 여전히 화장실이 밖에 있는 11평의 월셋집이었고, 나는 여전히 비싼 편입 학원을 다니며 영어 공부를 했다. 하지만 공부를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때문에 인터넷을 통해서 서울에 있는 대학교들의 편입 요강을 계속 보았다. 혹시나 영어 시험을 안봐도 되는 학교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그러다가 서울의 끝에 있는 사람들이 이름을 잘 모르는 한 대학교의 편입 요강을 보게 되었는데 그곳은 서류와 면접만으로 편입이 가능했다. 망설이지 않고 그 학교에 원서를 넣었다. 나는 간절했다. 그 간절함은 자기소개서에도, 면접 때도 잘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합격할 수 있었다. 친구들과의 바닷가에서 놀다가 합격 소식을 들었는데, 너무 기뻐서 방방 뛰었던 것이 생각난다. 2003년 여름이었다.
친한 친구들은 의경에 지원하여 9월 20일에 입대하게 되어 있었다. 혼자 남겨지는 것이 두려웠던 나는, 새로 편입한 학교에 바로 휴학계를 내고, 군대에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았다. 행정병에 지원하면 빨리 갈 수 있었다. 행정병도 서류 전형과 면접 과정이 있었다. 서류는 자격증을 통해 합격할 수 있었고, 면접은 착한 얼굴을 통해 합격할 수 있었다. 2003년 9월 15일에 군대에 갈 수 있게 되었다. 9월 20일에 군대에 가는 친구들의 배웅을 받으며 입대했다. 그들은 둘이었고, 나는 혼자였으니 내가 먼저 가는 것이 옳았다.
- 여담이지만 지금 그 두 친구는 서로 철천지원수가 되었다. 마음 아파라.
[군대 시즌 2003.09 ~ 2005.09]
훈련소 입소 후부터는 공황발작을 겪지 않았다. 하지만 꼭 공황발작을 겪을 것만 같았고 우울함은 극심했다. 잡초를 뽑다가도 탈영할 방법에 대해 생각을 했다. 심리 검사는 다 거짓으로 작성했다. 진짜로 작성했다면 훈련소에서 정신이상으로 쫓겨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6주 훈련의 과정에서 3주 정도가 지나자 우울함은 점차 사라져갔다. 매일매일이 두려웠지만, 살아남기 위해 눈을 반짝거렸다. 주말에는 반강제로 교회에 갔는데 거기서 주는 초코파이와 콜라를 정말 맛있게 먹으며 평생 해본 적 없는 기도를 했다. 그때, 교회가 참 좋았다. 마음이 편했다. 계속 기도를 했고 자기 전에도 기도를 했다. 편한 곳으로 보내달라고… 그렇게 훈련소 생활이 끝났다. 매일 두려워했지만 정말 두려운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 이 때의 기도 덕분에 훗날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생각이 많이 바뀌었고, 여러 상황속에서 은근히 기도를 하는 편이다. 이전에는 ‘신’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는데, 이 시절 이후로 ‘신’에 대한 궁금증이 늘 가득하다.
나의 기도가 이루어진 것인지, 아니면 행정병이라는 주특기 때문인지 몰라도 시설이 좋은 강원도 인제의 첨단부대 본부대에 배치되었다. 침대가 있는 생활관을 보며, 이제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며칠 뒤에 2주간 자대의 신병교육대에 다시 끌려갔다. 그 교육대에 도착하자마자 교관이 했던 첫 번째 말이 생각난다. “미친 말발이 새끼들, 기어!”. 실내에서 신병들이 기어가면서 바닥에 있는 먼지를 먹고 기침을 하기 시작하자, “입 닥쳐!”라고 두 번째 말을 했다. 물론 아무도 입을 닫을 수가 없었고 계속 먼지를 먹었다. 한동안 그 곳을 기어다니다가, 곧 연병장에서 북한군식 총검술, 총격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군군식 총검술을 배웠지만 알지 못했다. 동작을 잘 외우지 못하는 습성 탓이다. 훈련소에서는 총검술을 잘못해도 대충 넘어갔으나 이 곳은 달랐다. 비루한 몸을 이끌고 훨씬 더 동작이 많은 북한군 총격술을 배우느라 고생을 많이 할 수 밖에 없었다. 희한하게도 동작을 틀리면 열외를 시켜서 팔굽혀 펴기, 앉았다 일어나기,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골대 돌고 오기 등을 반복적으로 시켰다. 그래서 동작을 더 외울 수가 없었고, 훈련 시간 내내 운동만 하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총격술, 각개전투, 제식, 목봉체조, 지형정찰, 행군을 하는데, 모든 훈련은 사실상 무한한 체력단련이었다. 6주 훈련 뒤에 그보다 더 혹독한 훈련이었기 때문에 이 놈의 훈련이 끝이 없다는 생각을 하며 좌절했다. 기초군사훈련 하이라이트는 지형정찰에 있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길도 없는 산을 뛰어오르며 한참을 걸었던 것 같다. 산꼭대기에서 점심을 먹고 산을 다 내려오고 도로가 나왔을 때였다. 5km 정도만 더 가면 부대가 나오는 상황이었는데 하필이면 그때, 비가 왔다. 그냥 조금 내리는 비였다. 그냥 맞아도 되는 아주 얇은 비. 하지만 교육대장의 생각을 달랐던 것 같다. 남은 거리를 뛰어가라고 하는 것이다. 머릿속에는 ‘더 못 뛸 것 같은데…’, 입으로는 “야 천천히… 야 앞에… 천천히”. 내 동기들은 정말 착한 사람들이라서 속도를 줄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더 뛸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변명해보자면 이때는 정신적인 문제가 아니라 점심 식사에 문제가 있었다. 산꼭대기에서 점심을 많이 먹으면 응가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점심을 적게 먹었다. 나는 그렇게 탈진했다. 교육대장은 피도 눈물도 없이 나를 열외 시켰다. 그리고 한 명의 조교를 나에게 붙였다. 그 조교의 이름은 아직도 기억난다. 아마 그도 나를 잘 기억하고 있을 것 같다. 최 조교. 당시 일병이었던 최 조교는 나에게 탄띠의 한 쪽을 주고 끌고 갔다. 다시 변명을 하자면 그때 이 친구가 나에게 초콜릿을 주었다면 아마도 상황이 좀 더 빨리 해결되었을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도 그런 것은 없었다. 그는 일병이었으니까… 그렇게 그는 산꼭대기에 있는 신병교육대의 막사까지 나를 끌고 갔다. 그에게 미안하게도 혼자 힘으로 걸을 수 있는 에너지는 나에게 전혀 없었다. 막사에 도착하니 천사 같은 다른 조교가 나에게 홍차를 주었다. 설탕도 조금 밖에 안 들어간 그 홍차가 그때는 왜 그리 맛이 있던지… 나는 지금도 뛰다가 심장이 터질 것 같을 때에는 이 때가 떠오른다.
- 소총을 들고 방탄모에 전투복을 입고 헉헉 거리며 뛰어다니던 이 때가 가끔 그립다. 이런 하드 트레이닝을 받아야 살이 빠질텐데…
저녁식사 시간이 되었고 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밥을 위로 쌓아올려서 먹었다. 이제 응가 문제가 발생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밤이 되자 탄띠로 나를 끌고 왔던 최조교는 나를 불렀다. 나무 막대기를 하나 들고 죽이네 살리네 했다. 맞아서 병원에 가면 훈련이 끝나니 그만이기도 했고, 또한 그가 타부대 사람이었기 때문에 두려울 것은 없었다. 그도 내가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100일 휴가로 협박을 했다. 만약 이 훈련에서 낙오하게 되면 100일 휴가를 못 갈 것이라고 말이다. 물론 나는 그것도 두렵지 않았다. 그 때의 생각으로 100일 휴가는 안가도 그만이었다. 결국 그는 이런 저런 욕만 한참 하다가 다른 조교가 말리자 그제서야 나를 보내주었다. 혼자서 총격술과 각개전투를 많이 연습해봤으나 그래도 잘되지 않았고, 어떤 조교는 본인이 열받아서 1:1 레슨을 시도했으나 그것도 잘되지 않았다. 저녁식사 후의 휴식시간에 단독군장으로 그 조교와 둘이 밖에서 훈련을 했다. 하지만 그의 많은 생각과는 달리 나는 기본적으로 타고난 몸치였다. 변하는 것은 없었다. 물론 어떻게 하면 변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곳에서 그 정도의 동기부여로 될 일은 절대 아니었다. 이 때의 경험으로 지금도 동기부여라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당시에 어떤 강한 군인을 떠올리며 했다면 잘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런 생각들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이후에는 어떤 일을 진행하기 전에 개인적인, 감성적인 동기부여를 많이 하는 편이다.
- 최조교는 훈련 중에 나에게 욕을 하다가 다른 교관에게 뺨을 맞기도 했었다. 그가 크게 잘못한 것은 아니었는데… 그가 나에게 욕한 것과 교관이 그의 뺨을 때린 것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모르겠다. 이 훈련 중에 최조교는 나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 훈련의 막바지가 다 되어 갔다. 마지막 훈련은 40km 행군이었다. 강원도는 온통 산이기 때문에 40km 행군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래도 이 신병교육대의 훈련 중에서는 편한 편이었다. 행군 중에 점심시간이 되었다. 최조교는 걱정이 되었는지 나와 다른 한 명을 끌고 30분 ~ 1시간 정도 먼저 출발했다. 그때 우리 부대와 그의 전투부대가 같이 행군을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그의 전투부대의 우월함을 보여주기 위한 마음이 반 정도 있었을 것 같고 나머지 반은 진짜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 같다. 이유가 어떻든 간에 그는 그렇게 혼자서 갖은 고초를 다 겪었고, 우리는 신병교육대와 동일하게 맞춰서 들어올 수 있었다. 훈련소에서는 행군이 끝나면 초코파이랑 콜라를 주는데 이때는 그런 것도 없었다. 얼마나 안타깝던지… 다음날 단장 사열이 있었고, 적당히 잘 하고 이 신병 훈련을 마치게 되었다. 훈련을 마치고 부대로 가는 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 해의 첫눈이 내렸다. 2003년 11월의 어느 날이었다.
- 부대에 이 신병 훈련이 존재한 것은 정말 다행이었던 것 같다. 이 훈련은 내 군생활의 방향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또한 군생활의 경험에서 이 2주의 경험이 없었다면 군생활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느낌이다. 자원해서 그런 훈련을 받은 것은 아니었지만 군생활을 넘어서 인생 전체에 있어서도 중요한 포인트였다.
다시 부대에 도착하자 처음 보는 우리 분대장은 나에게 쌍욕을 했다. 부대 망신을 시켰다며… 그렇게 일반적인 군생활이 시작되었다. 새로운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기에 약간 두려웠으나 부대가 행정부대라서 그렇게 좋지 않은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곧 연말이 되었고, 부대 전체가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먹었다. 술과 고기를 함께 하는데, 천국 같이 느껴졌다. 천국과 지옥이 함께 하는 곳이라는 생각을 했다. 어떻게 보면 사실 약간의 갭이었는데, 이런 갭을 인생에서 처음 느껴본 것이기 때문에 좀 혼란스러웠던 것 같다. 이 별 것 아닌 것을 가지고 참 생각을 많이 했다. 이런 상황보다도 세상에는 훨씬 더 다양한 상황이 존재하며, 그것이 실제 사실이라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다양한 환경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2004년 1월, 새로운 고통이 시작되었다. 잠을 못자는 고통. 한 3개월동안 미친듯이 키보드를 두들겼다. 한글97로 문서를 만들어댔다. 단축키가 포괄적으로 빠르게 먹는 것은 한글97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 때는 우리 행정부대에서 탄약고 근무를 서고 있었기 때문에, 하루 2번 근무는 기본이고 재수없으면 하루 3번까지 탄약고와 불침번 근무가 섞여서 배정되었다. 그러면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근무를 서고, 키보드를 두들기다가 근무를 서고, 그러다보면 밤이 되고 다시 키보드를 두들기고 새벽이 되고 근무를 서고… 눈이 오고 눈을 치우고… 또 눈이 오고… 이런 식의 반복이었다. 제대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겨울은 정말 춥고 시렸다. 다만 좋았던 점은 한글97과 파워포인트의 달인이 되어갔고, 문서 작성은 전문가의 경지, 발표 자료 작성은 준전문가의 경지에 올라있었다. 문서 작성에도 전문가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도 문서 작성만큼은 최고의 레벨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서가 균형이 안맞으면 종이가 휘어보인다.
그런 시간이 반복된 후에 뒤늦게 100일 휴가를 나가게 되었다. 군생활 중 대부분의 휴가는 부모님이 부대에 와서 나를 데리고 가곤 했는데 유독 그 휴가 때는 데리러 오지 않으셨다. 내가 그 나이에도, 사실 지금까지도 길치인데다가 소변 걱정에 버스를 잘 못타기 때문에 늘 데리러 오시곤 했다. 집이 이사했다는 소식을 들어서 공중전화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집을 찾았다. 마당이 딸린 전셋집이었고, 키우던 개인 말라뮤트 두 마리가 마당에 있었다. 내가 대학교를 서울로 옮겼고, 군대에 갔으니 돈 드는 일이 없어져서 드디어 전세로 바꿀 수 있었던 것 같다. 4박 5일짜리 100일 휴가는 눈을 깜빡하니 끝이 났다.
2004년, 봄이 되고 일병이 되었다. 신병교육대의 기억을 떠올리며 웨이트 트레이닝을 시작했다. 몸무게가 70kg를 넘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70kg 이 되는 것이 목표였지만 전역할 때까지 70kg 을 넘지 못했다. 지금은 몸무게를 80kg 밑으로 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어쩌면 당시의 목표는 참 쓸데없어 보인다. 근무처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책이 한 권 완성되자 더 이상 문서 작업으로 고생할 일은 크게 없었다. 그런 식으로 적당히 일병 생활이 지나가고 탄약고 근무는 전투부대에게도 넘어갔다. 우연히도 우리 행정부대에서의 탄약고 근무는 내가 마지막 근무였었는데, 전투부대의 첫 근무자는 상병이 된 최조교였다. 그 때 같이 온 간부한테만 경례를 하고 최조교에게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었는데, 인사라도 할 걸 그랬다. 그 때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때였다. 이렇게 해서 탄약고 근무는 없어졌다. 부대는 더욱 편해졌고, 이 때쯤 이 부대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실패되면서 해당 일이 1년이 연기되었다. 이 실패는 우리나라 육군에는 치명적인 실패였지만, 내 남은 군생활은 몽땅 편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 때부터는 1년동안 매일 연등을 하고 이런 저런 책을 신나게 읽고, 역사를 잘 아는 선임과 담배를 피고 이야기를 하는데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역사학 석사였기 때문에 주로 역사와 정치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때 배운 것은 좌우파의 개념과 얕은 깊이의 세계사, 얕은 깊이의 종교였다. 이 선임은 당시에 서른 살 정도였는데 영어와 한자에 능통했었고, 모든 분야의 지식 수준이 굉장히 높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봐도 참 똑똑한 분이셨고, 이 때 이 분을 만난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그 사이에도 한 번의 유격과 세 번의 행군이 있었고 사격과 기타 잡다한 훈련도 늘 있었다. 신병교육대에서의 훈련 기억과 많은 운동량으로 인해서 더이상 그런 일반적인 훈련들은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예전에 겪었던 신경증 혹은 우울함 같은 감정은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정확히 무슨 병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때 완치가 되었다. 이왕 군복을 입은 것, 진짜 군인으로 살기 위해 노력을 많이 했고 나름대로 멋지게, 열심히 살았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병장이 되고 분대장이 되었다. 그 전까지는 그렇게 크게 생각했던 적이 없었는데, 분대장이 되니 내 분대를 망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대장이 되고부터는 군기 유지와 체력 강화를 위해 애를 썼다. 하지만 편하게 지냈던 분대인지라 역효과가 좀 심했던 것 같다. 곧 우리 분대의 반 정도는 나를 싫어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열심히는 했는데, 설득이 부족했고 오해를 쌓은 것 같다. 단, 이 시기를 통해서 내 방식의 리더쉽에 대한 개념을 정립할 수 있었다.
- 이 시기의 경험을 통해 훗날 깨달았다. 리더가 어떤 방식으로 일을 해도 기본적인 목표를 달성하기가 힘들고, 존중을 얻는 것은 그보다 더 힘들다는 것.
- 이후 리더의 자리에서 서서히 이 리더쉽을 잘 발전시킨 것 같다. 좋은 것은 취하고, 나쁜 것은 버려가며… 인생의 다양한 부분에 크게 자신이 있는 것이 없는데, 신기하게 좋은 리더가 될 자신은 있다.
전역할 때쯤 부대의 중요한 목표가 성공했다. 곧 그 성공에 따른 중요한 훈련이 있었다. 내 군생활 내내 하던 일이 그 목표와 연관성이 많은 일이었기 때문에 그 훈련에 참여하고 싶었다. 근무처의 반장님이 내 마음을 알고 있었는지 훈련장에 따라나오라고 하였다. 덕분에 간부들만 입는 멋진 전투 조끼를 입고 훈련장에 나가게 되었다. 1박2일을 두번에 걸쳐서 따라 갔다. 훈련을 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에 밤을 세는 것을 제외하고는 힘든 것은 없었다. 그런데 마지막 훈련이 끝나는 날에는 2개 대대와 우리 부대 전체가 듣는 무전으로 내 이름이 반복해서 들렸다. 반장님이 내 이름을 부르며 계속 찾았던 것이다. 빨리 와서 차에 타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영광스러운 기억이다. 부대의 목표가 달성되어 문서 작성만 잘하는 나는 더이상 할 일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그저 집에 갈 준비만 하는 사람이었고 그 훈련에 참여한 것만으로도 감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반장님은 아마도 그 때, 나를 좀 띄워주려고 했던 것 같다. 정말 영광스러웠다. 말년의 고통을 잊게 해줬던 순간이었고, 군생활 전체를 보답받는 것 같았다.
2005년 9월 20일, 전역하는 날이었다. 전역식에는 반장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시계를 주셨다. 대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할 때 교육받는 곳에서 준 시계 같은데, 왜 나에게 그 시계를 준 것인지는 그 의미는 잘 알지 못하지만 그 자체에 대해 여전히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육사 출신의 소령이었고 다른 소령에 비해서 어렸던 것 같다. 아마도 별을 달았거나 앞으로 달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좀 더 살갑게 대했다면 좋았을 것을… 군생활동안 두 명의 반장님들을 모셨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두 분 다 무척 훌륭한 군인이었다.
- 마지막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전역식에 오신 반장님은 대령이며 특별한 부대의 연대장이었다. 아마 곧 장군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그 부대의 성장과 변화 앞에서 전역하게 되었다. 전역하는 날에도 부모님이 데리러 오셨다. 지난 군생활이 짧게 느껴졌다. 뭔가 더 할 일이 남은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한 것 같다. 2년 정도의 시간동안 그 부대에서 한 일이 훈련을 주관하는 것이 아니라 훈련을 준비만 했으니 그렇게 느낄만 한 것 같다. 인생에서 군생활은 정말 짧고 굵게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는 시간이었다.
[황금 시즌 2005.09 ~ 2007.01]
군생활이 끝나고 2005년 9월말이 되었다. 새로운 대학교에 바로 복학을 했다. 말년 휴가때 이미 교수들에게 양해를 구했기 때문에 바로 복학할 수 있었는데 대학생활은 심히 피곤했다. 새로운 학교는 지하철로 집에서 1시간 30분 ~ 2시간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곧 겨울방학이 되었고 내내 고민하던 끝에 전과를 결심했다. 아무래도 졸업이 다가오는데 프로그래밍은 잘 못한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지도교수님께 컴퓨터공학에서 사회과학쪽으로 전과하는 것에 대한 허락을 구하고자 학교에 찾아갔다. 그 교수님은 나에게 단순한 for문과 함수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체크하였다. 물론 그 정도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에 다녀오는 프로그램이 있으니 신청하고 1년동안 인도에 다녀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전과를 거절당하고 잠시의 생각 끝에 2007년에 인도를 가기 위해 휴학을 했다. 3학기가 남아있는데 인도에서 2학기를 보내려면 한 학기를 휴학을 해야 했다.
2006년이 되었고 사실상 백수였다. 공무원 시험도 준비해보고, 주식 투자도 해보고, 아나운서가 되어보겠다고 웹을 열심히 뒤지기도 하며, 이것 저것 하고 싶은 거 다 해보았다. 나머지 시간은 모두 완벽하게 놀았다. 매일이 술판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친구들이 불렀다. 그 때는 그랬다. 하지만 그렇게 좋은 때에 참 좋은 때라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상당한 나이에 돈을 벌지 않고 학교 생활을 하고 있으니 스스로 부끄러웠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아르바이트 같은 건 정말 하기 싫었다. 이런 저런 죄책감을 가진 채로, 하지만 죄책감과 관계없이 하고 싶은 것들을 다 해보며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행복한 6개월을 보냈다.
여름방학 시즌에는 인도에 가는 프로그램에 신청했다. 여름방학부터 조를 짜서 영어 스터디를 시작했고, 3학년 2학기의 모든 수업은 이틀만, 그것도 오후에만 학교에 가면 되도록 수강신청을 했다. 그래서 3학년 2학기에는 컴퓨터 공부를 대충 하고, 듣고 싶은 교양 수업을 마음껏 들으며 편히 지낼 수 있었다. 전공 필수는 다 들었고, 전공 선택은 인도에서도 채울 수 있었기 때문에 주로 문학, 음악, 디자인 등의 예술 관련 과목들을 수강했다. 학교에 채플이 있었는데 채플도 음악 채플을 들었다. 그래서 채플을 듣는 시간 마저 즐거웠다. 남는 시간에는 주로 영화를 보고 음악을 들었으며, 친구들을 자주 보며 계속 놀았다.
학기가 거의 끝나가고 인도에 가는 프로그램의 마지막 테스트가 있었다. 영어 발표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무도 떨어지지 않는 그 테스트에서 내가 떨어졌다. 공부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니 아직도 영어의 기본이 안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굳이 탓하자면 상황상 내내 선후배, 동기가 없었던 탓이 조금 있었다. 배울 수가 없었다.
나는 부끄러웠고, 또 좌절했다. 지금도 부끄럽다. 공부는 많이 안했지만 그래도 기대와는 다르게 인도에 못가게 된다고 하니 슬프기만 했다.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친한 친구와 찜질방의 노래방에 가서 계속 노래만 불렀다. 그리고 집에 와서 계속 생각을 했는데, 전과를 반대한 교수님이 곧 인도 프로그램의 담당 교수이니 이럴거면 왜 전과를 반대했냐고 하면 뭔가 해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적당한 길이의 이메일을 보냈다. 현재의 여러가지 상황과 함께 인도에 갈 생각 뿐이었다는 이야기를 적고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메일을 보낸다고 썼다. 곧 학교에서 연락이 왔다. 메일이었는지 전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나인지 몰랐다고 합격시켜줄테니 인도에 다녀오라고 연락이 왔다. 나는 환호했다. 편입시켜준 것도 고마운데 인도까지 보내주니 그저 그냥 행복했다. 이 때쯤에는 꿈을 꿔도 똥이 막 하늘로 펑펑 튀는 그런 꿈을 꾸고 살았던 것 같다. 참 행복했다.
2006년 말에는 그렇게 계속 놀면서 인도갈 준비에 온 힘을 다했다. 겨울에는 관련 교수님들과 인도에 가는 학생들이 함께 북한산에 등반하는 일이 있었다. 눈이 많이 쌓인 상황이라서 학생들을 데리고 등반하기에는 위험한 상황이었는데 취소가 안되고 모두 등반하게 되었다. 아침 9시쯤 출발해서 저녁 6시에 내려온 것으로 기억한다. 교수님들이 길을 잃어서 돌고 돈 것이다. 그 상황에서 한 교수님은 빠르게 먼저 하산하셨다. 그 때에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 교수님은 그 때 큰 실수를 하신 것 같다. 이제 갓 20살, 21살 된 친구들도 많았고, 곧 인도에 가서 공부를 해야만 하는 상황 속에 있는 학생들이었다. 그들을 두고, 홀로 하산을 하다니…
2006년은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삶 중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행복했고, 행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2007년 1월 초의 어느 날, 집은 다시 월세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원래의 집이 왕십리였는데 아차산역 근처의 마당이 있는 지하철이 가까운 월셋집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당시에는 우리 말라뮤트 두 마리 때문에 꼭 마당이 있어야 했다. 당시 왕십리는 재개발되는 상황이라 쫒겨나는 상황이었는데, 그 와중에도 내가 인도에 갈 비용을 준비하느라 여러가지로 좋지 않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수도 있다.
- 그 시점에 왕십리나 그 근처에서 오래 살던 가난한 사람들은 다 다른 지역으로 이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 이후 천천히 왕십리는 부자이거나 부자가 된 사람들이 사는 곳이 되어갔다.
[인도 시즌 2007.01 ~ 2008.01]
2007년의 내 생일, 1월 16일에 잘 알지 못하는 선후배들과 함께 인도에 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후배이다. 대학생활 처음으로 선후배가 생긴 것이다. 하지만 잘 몰랐던 것은 이 분들은 4개의 과에서 온 사람들이라서 서로도 그렇게 친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잘 모르고 그냥 여기 저기 기웃거렸다. 지금이면 절대 그렇게 못할 것 같은데, 남자들 중에서는 어리다는 점을 내세워 살아남기 위해 애썼던 것 같다. 물론 처음에 본 그 선후배들은 다 좋았다. 인도에서는 뱅갈로르라는 지역에서 지냈는데 각자 집을 구해서 살아야 했기에 2명의 선배와 함께 집을 구해서 살았다. 이렇게 저렇게 처음으로 선배들이 생겼고 다른 집에 자주 놀러다녔다. 내가 걸으며 음악 듣는 것을 좋아해서 MP3 플레이어를 귀에 꽂고 이 집에서 저 집까지 이동하며 음악 듣는 것을 즐겼기 때문이다. 교육기관에 다녀오면 늘 그러고 돌아다녔다. 이 집, 저 집에서 그냥 놀고 집에서도 그냥 놀고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좀 그냥 가만히 공부나 하고 혼자 적당히 지냈으면 좋았을 것을… 너무 기웃거렸던 것 같다.
드디어 공부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한 선배에게 데이터베이스를 배웠고 위키피디아의 존재를 배우게 되었다. 이 두가지는 내가 프로그래머가 되기 위해 꼭 필요한 마지막 두 조각이었다. 프로그래밍이야 어거지로 하면 되는 것이고 데이터베이스를 배웠으니 무었인가를 만들 수는 있게 된 것이다. 그보다 더 대단한 것은 위키피디아였다. 지금이야 흔한 얘기지만 당시에는 충격이었다. 이렇게 나에게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게 되었고 한 선배는 음식, 영어, 프로그래밍, 발표 등 모든 부분에서 나에게 정말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방식대로 공부를 하며 그 방식을 알기에 공부에 대해 자신감을 잃지 않는다. 중고등학교때 미리 알았다면 서울대도 갈 수 있었을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는 욕하는 선배만 있었지, 뭘 가르쳐주는 선배는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이의 교육을 위해 부자동네를 고집하는 것 같다. 이 선배에게는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 Special thanks.
- 또 같이 살았던 한 선배는 늘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훗날 현재 진행하고 있는 사업을 시작할 때도 “넌 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나에게 “할 수 없다”라고 말한 사람은 인생에 별로 없지만, “할 수 있다”라고 말해준 사람은 이 선배 뿐이었던 것 같다. Special thanks.
이렇게 저렇게 또 놀면서 교육기관을 대충 다녔다. 자격증도 따고 영어도 100시간 넘게 공부했지만, 기본이 되는 교육기관에는 잘가지 않았다. 그 곳은 지루했다. 너무나 지루했다. 어느 날에는 관련 교수님들이 점검차 인도를 방문하셨다. 출석이 안좋은 학생을 한국으로 보낼 수도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나는 출석이 좋지 않았다. 이메일을 보내서 봐달라고 사정하고, 만나서 봐달라고 사정했다.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준 선배의 조언에 따라서 장문의 편지를 써서 읽기도 했던 것 같다. 그렇게 애써서 인도에서 살아남기는 했으나 F가 2개 생겼다. 원래 인도에 다녀오면 복수전공이 인정되는 것인데, 결국 복수전공은 물건너갔고 졸업 때 학점은 2.36 이 되었다. 정말 본 적 없는 점수였다. 어쩌면 무사히 졸업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이런 저런 우여곡절 속에 많은 사람들과 정말 다양한 일들을 겪으며 인도에서의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다양한 일들 속에서 나는 빠르게 처음처럼 다시 이방인이 되어갔던 것 같다. 물론 이방인이 되어갔던 것과는 상관없이 그 1년은 행복한 1년이었다. 선후배 하나 없던 나에게 그래도 선배들이 생겼다는 것이 기뻤고,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그 자체가 굉장한 매력이었다. 마지막에 인도를 다 여행하지 못했던 것이 언제나 아쉽다.
- 그 때 인도를 한바퀴 돌았어야 했는데… 지금은 다시 못가겠다. 가족과 함께 여행하기에는 위험하다. 인도는 어릴 때 가야 편한 곳이었다.
[회사1(언론사닷컴) 시즌 2008.01 ~ 2009.04]
2008년 1월, 아쉬움 속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겨우 1년을 다녀온 것인데, 우리나라는 정말 반가웠다. 다만, 인도에서 외국인으로 살다가 한국에서 한국인으로 살면 부자였다가 가난해지는 것이다. 다시 서서히 가난을 느꼈다. 집은 여전히 아차산역 근처의 월셋집이었다. 우리나라에 도착해서 아빠의 흰머리를 보고 많이 늙으셨다고 생각하며 안타까워 했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아빠는 참 젊었다. 50대였고, 흰머리는 원래 많았었다. 내가 착각한 것이다. 아무튼 그런 착각 속에서 빨리 취직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졸업은 확정이었으니 도착하자마자 입사지원서를 썼다. 두 군데에만 입사지원서를 넣었는데 그냥 면접까지 진행이 되었다. 곧 두 군데에서 모두 합격을 했다. 집에서 가깝고 안이 예쁘게 생긴 언론사닷컴 기업으로 입사를 했다. 그렇다. 이상하다. 서울의 끝에 있는 이름이 유명하지 않은 학교의 졸업장과 2.36의 성적서로 어떻게 합격한 것일까? 아마도 나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당시 해당팀의 막내가 28살(우리나라 나이) 여성 2명이었다. 그럼 28세 미만으로 뽑아야 하는데, 여자는 그 나이의 인원을 뽑기가 쉬운데 남자는 군대 때문에 그 나이의 인원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여기에 내 선한 인상이 추가로 한 몫 하여 합격할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던 것이다.
- 우리나라의 정서를 고려했을 때, 거의 확실하다.
이렇게 별로 고생하지 않고 내 입장에서는 꽤나 괜찮은 회사에 쉽게 취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도 회사답게 생긴 좋은 회사였고, 한 반년 정도는 늘 즐거웠던 것 같다. 좀 적응을 해나가자 또 여기 저기 기웃거렸다. 이 선배, 저 선배, 선배들 사이에서 막내 특권을 써가며 즐겁게 지냈다. 또 부족한 부분은 하나 뿐이었던 동기가 채워주었다. 그렇게 편히 지냈던 것 같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한 선배와는 더욱 더 친하게 지냈는데 그 선배는 무엇이든 정도를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선배를 정도를 지키는 사람으로 여기고 그의 말을 최대한 잘 듣기 위해 노력했다.
- 이후에도 이 선배와는 거의 5년 정도를 더 연락하고 지냈는데 작은 돈을 빌려갔고 그 돈을 갚지 못하며 나와는 연락이 끊기게 되었다. 훗날 이 선배가 이 회사를 그만 둘 때 더 강하게 말렸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소극적이었던 것이 지금도 아쉽다. 어려운 시기를 함께 해준 선배라서 지금도 가끔 기억이 난다. 이러나 저러나 그는 참 좋은 사람이었다. 다시 한번 얼굴을 볼 날이 있을런지…
이 시절에는 처음 돈을 벌다보니 어떻게 돈을 써야 하는지를 몰랐다. 한 달에 80만원씩을 고위험 펀드에 넣었다. 곧 반토막이 났었다. 왜냐하면, 2008년 미국 금융위기 때문이다. 그 때는 그런 것인지 몰랐다. 어쨌든 그냥 그대로 들고 지금까지라도 있었으면 대박이었을텐데, 아쉽게도 나는 반토막에 팔았다. 또한 아껴야 하는 부분에 돈을 많이 쓰고 써야 할 곳에 쓰지 않는 행위를 많이 했다. 그야말로 돈이 뭔지 잘 알지 못했다.
프로그래밍, 술, 프로그래밍, 술이 반복되었다. 친구들은 계속 사방에서 불렀고, 회사에서도 술 먹을 일이 많았다. 이 때부터 나는 서서히 내가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저 또래 친구들과 노는 것이 좋았던 것이지 내 몸과 술은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이었다. 프로그래밍 실력은 조금씩 좋아졌다. 웹 프로그래밍은 재미가 있고 깊이도 있었다. 여러가지로 생각할 것이 많았다. 하지만 좋은 회사라서 고생할 일이 별로 없었다. 편했으나 배움은 더뎠다. 돈 계산을 해보아도 답이 없었다. 집을 한 채 사기에는 너무 길게 느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생각이었는데 그 때는 그저 무언가 다른 방법을 찾고 싶었다. 회사생활이 1년정도 흐르니 역시 이 곳에서도 나는 이방인을 선택해서 가고 있었다. 뭔가 나와는 많이 다른 세계라는 느낌이 들었다. 당시의 상황을 정확히 알지는 못한다. 이 성격에 그 어림까지… 실수가 없지는 않았으리라고 짐작만 한다. 가끔 이불킥을 할 때면 떠오르는 기억은 거의 이 시절의 기억이다. 이런 저런 여러가지 이유로 2009년 4월쯤에 도망나오듯이 퇴사하였다.
- 현실적으로 그 당시의 내 수준에서 그 결정은 사실 실수였다. 그 실수를 회복하기 위해서 꽤 긴 시간동안 많은 노력을 해야 했다. 이 실수를 실수가 아닌 것으로 만들기 위해 큰 대가를 치뤄야 했다.
[실업자 시즌 2009.5 ~ 2009.09]
퇴직금으로 맥북을 샀다. 아이폰 앱을 개발하고 싶었다. 하지만 생각만 가득할 뿐, 시작도 못했다. 훗날 그 맥북은 오랜 시간동안 유튜브 전용 뷰어로 사용되었다. 이 때부터 5개월간 인생에서 유일하게 진짜 실업자가 되었다. 걱정과 불안이 가득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입사지원서를 엄청나게 넣었고, 면접도 엄청나게 보았다. 나머지 시간은 친구들을 만나서 위로받는 것과 영화 보는 것만 했던 것 같다. 서류는 합격률이 높았지만 면접에서 계속 떨어졌다. 패기넘치는 28살의 개발자 지망생 같은 느낌을 너무 많이 준 것과 회사들이 대체적으로 보수적이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회사는 당연히 보수적이다. 무릎 꿇고 제발 합격시켜달라고 했어야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 많은 면접은 좋은 경험이 되었다..
집은 또 이사를 했다. 아차산역 근처의 마당이 있는 월셋집에서 장안역에서 먼 마당이 없는 주택의 월셋집으로 말이다. 이사를 할 때, 집 주인과 그의 가족 일부가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보증금을 이미 줬는데 우리 가족이 시간에 맞춰 나가지 않을까봐 내내 지켜보고 있었다. 이사를 가자 새로운 집에 에어컨을 설치했는데 에어컨 설치비가 당연히 많이 나왔다. 집 주인과 그의 가족 일부가 이삿짐이 나가는 것을 보고 있는 것도 서러웠는데, 에어컨 설치비가 비싼 것이 그 때는 참 서러웠다. 이사비도 내고 에어컨 설치비도 내고 월세도 내고 가난한 집이 내는 돈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단, 이때에도 지하철은 가까웠다.
- 이 글을 쓰고 4년 뒤에 알게 된 사실이다. 이사를 할 때, 그 집주인과 가족들이 이사하는 모습을 이상하게 지켜보고 있었던 이유는, 우리가 살던 이전의 세입자가 깡패였기 때문이었다. 그 깡패들이 강요해서 우리 집이 너무 싼 금액으로 그 집에 살고 있었고, 집주인과 그 가족들은 걱정이 됐던 것이다. 이런 일들이 내 집 마련을 가속화했는데, 이제 와서 보니 아무 일도 아니었다니, 놀랍다.
2009년의 어느 여름날, 한 친구는 나에게 제안을 했다. 그냥 돈이나 벌어보라고… 월 300은 벌 수 있으니 예전에 본인이 일하던 가라오케에 가서 일을 해보라는 것이었다. 나는 술을 먹다말고 당장 소개를 해주라고 했다. 그 가라오케로 바로 가서 면접을 봤다. 그 곳은 늘 인력이 모자랐기에 쉽게 합격했다. 대부분의 가라오케가 그렇겠지만 웨이터는 팁이 수입원이고 그 외에는 급여가 없었다. 주문을 받고 서빙을 하고 청소를 하고 고객만족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그 곳 웨이터의 일이었다. 첫 날에는 왼손으로 서빙하는 방법과 청소하는 방법을 배웠다. 나머지 시간은 한 층에 서서 대기하였다. 곧 아침이 되었고, 퇴근했다. 원래 신입 웨이터가 오면 나머지 웨이터들이 받은 팁을 나눠서 일당으로 적당히는 주는 것이 관례이지만 신입 웨이터가 너무 많이 그만둬서 그런 것들은 다 사라진 것 같았다. 잠을 적당히 자고 다시 저녁에 출근, 그리고 여전히 서빙하는 방법과 청소하는 방법을 배웠다. 두번째 날은 청소를 빨리 하는 방법에 대해서 생각해보았다. 그냥 그릇 다 빼내고 물을 뿌리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었다. 이래저래 일을 하고 다시 퇴근.
퇴근 후 집에서 자고 일어났는데 걸을 수가 없었다. 왜 그 때였는지는 몰라도 발 뒷꿈치에 염증이 잇었고 생전 처음 겪는 고통이라서 몹시 고통스러웠다. 부모님을 호출했다. 어떤 대학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딱히 해줄 것이 없었던 것 같다. 진통제만 받고 다시 집에 오게 되었다. 이렇게 가라오케의 웨이터 생활과는 작별했다. 계속 했다면 몇 일을 더 버텼을지 아니면 다 버티고 계속했을지 모르겠지만, 나의 운명은 가라오케에서 이틀만에 나를 떠나보냈다.
- 인터넷을 통해 병명을 검색해보았는데 비슷한 병은 류마티스 관절염과 통풍 뿐이었다. 이후 병원에서 검사해본 결과 류마티스 관절염은 아니라고 나왔고, 현재는 통풍으로 예상만 하고 있다. 소염진통제가 금방 회복시켜 주기 때문에 병원에서 진단을 받지는 않았다. 이렇게 탄생한 이 병은 지금까지도 주기적으로 나를 괴롭히고 있다.
- 결혼 후에 아내가 류마티스에 걸렸는데, 이 경험으로 그녀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가라오케에서의 이틀동안에도 배운 것이 있었다. 이들은 손님을 접대하고 팁을 받는데, 사실상 팁과 제외된 유일한 일은 청소 뿐이었다. 바꿔말하면 청소만 잘하고, 나머지 일들이 문제없게 진행되도록 하기만 하면 사실 돈은 저절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때문에 청소를 빨리 할 수 있도록 머리를 쓰고 거기에 집중해서 노력해야 했는데 아무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각자 주머니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고 기존 질서를 깨뜨리고 새 질서를 만드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핵심은 그저 청소만 쉽고 빠르게 하면 되는 것이었다. 나에게 핵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2009년 가을, 빨리 취직하고 싶은 마음에, 입사지원서를 뿌리다시피 여러 회사에 마구마구 보냈다. 곧 한 웹에이전시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위의 경험 덕분에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고 생각한 나는 최선을 다했다. 대표님과 개발팀장님이 대놓고 마음에 든다고 했고, 드디어 다시 회사를 다니게 됐다는 생각을 했다. 해당 회사를 인터넷에서 검색해보았는데 필연적으로 기획팀장님의 블로그를 볼 수 있었다. 블로그를 통해 그 팀장님의 웹에 대한 생각, 회사에 대한 생각들을 보게 되었다. 이런 사람과 같이 일을 할 수 있다니 너무 좋았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메일을 썼다. 합격한 줄 알았는데 어떤 문제가 있는지 불합격인 것인지에 대한 질문과 간절함을 담은 메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회사에서는 출근을 하라는 연락이 왔다. 아마도 애매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메일이 오니 합격시켜준 것 같다. 당장 원하는 페이는 줄 수가 없고, 3개월쯤 같이 일해보고 생각해보자고 하였다.
[회사2(웹에이전시) 시즌 2009.10 ~ 2010.08]
2009년 10월, 이 웹에이전시에 입사한 뒤에는 더이상 여기 저기 기웃거리지는 않았다. 그저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정도만 움직였다. 이 맘 때쯤부터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은근히 두려워했던 것 같다. 보여지는 것 중심의 처음 보는 스타일의 프로그래밍을 해가며, 또 배워나가며 즐거웠다. 분위기도 대체적으로 좋았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대표님이 여성이었는데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입사 후 1주일 정도 지났을 때는 등산을 다녀왔다. 이 산이 어디였는지 지금도 모르는데 거의 내리막길이 위주였다. 가장 빨리 가야 하나 가장 늦게 가야 하나를 고민하다가 분위기를 보니 늦게 가야 하는 것 같아서 가장 늦게 갔다. 뒤쳐진 분들과 함께 천천히 등산을 마쳤다. 중간에 발이 좀 많이 부어서 못 걷는 분이 있었는데 기대했던 헬기는 오지 않았다. 구조대가 산을 뛰어 올라와서 파스를 붙여주고 붕대를 감아준 뒤 그냥 계속 걷게 했다. 하긴. 이 정도에 헬기를 띄우지는 않겠지. 또 회사를 통해 사이판에 가게 되었다. 사이판의 일정은 회사의 일정처럼 빡빡했다. 쉬지 못해서 고단하면서, 다른 현편으로는 쉴 새없이 즐거웠다. 다들 좋은 사람들이었고, 무엇보다도 열정이 있었다. 아마도 다들 지금쯤 잘먹고 잘살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이런 저런 액티비티들을 마음껏 즐기고 적당히 재미있게 잘 놀고 다시 돌아왔다. 그 이후 입사 3개월이 지났으나 최초 원했던 페이는 받을 수가 없었다. 연봉 300만원 정도 올려주면 되는 것이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책임감이 약한 편이었기 때문에 급여를 올려주는 것은 어려웠던 것 같다.
이맘 때쯤 디자인팀의 과장님이 워드프레스라는 블로그를 해보라고 조언해주셨다. 툴이 워낙 막강해서 빠르게 사이트들을 만들어낼 수 있을 거라고, 배워보면 나에게도 회사에도 도움이 많이 될 것이라고 말해주었다. 그 때쯤부터 지금까지 개인 블로그를 만들어서 운영했다. 회사에는 도움을 주지 못했지만 내 인생에는 큰 도움이 되는 조언이었다. 한동안 남는 시간은 모두 워드프레스로 만든 블로그에 글을 쓰는 것과 워드프레스 플러그인 만들기에 집중했던 것 같다. 물론 그 플러그인은 쓸 수 없는 플러그인이 되어버렸지만 말이다.
- 이 글에도 있지만 이 조언을 들을 덕분에 큰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었고, 개인 블로그는 평생의 유익한 취미생활이 되었다. 조언은 들어두면 늘 도움이 많이 되었다.
그 이후로 서서히 바빠졌다. 작고 큰 여러가지 일거리가 한꺼번에 들어왔다. 점점 야근은 잦아졌고, 당시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그런 개발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 운동하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삶은 조금씩 피폐해져갔다. 그러던 어느 겨울날 아침에 일어났는데 일어날 수가 없었다. 허리 디스크가 탈출한 것이다. 아주 많이 고통스러웠다. 회사에 도저히 못가겠다고 연락을 하고 동네에 살고 있는 실업자 친구 2명을 불러 함께 병원에 갔다. 이 때 통증을 줄여주는 곳에 갔는데, 의사인지 뭔지 모르는 흰색 가운을 입은 어떤 사람이 엑스레이를 찍어보고 바로 신경을 차단하는 방식의 시술을 했다. 한동안 누워있었는데 이 때, 의사가 말하기를 이제 평생 디스크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라고, 완치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시술은 끝나서 고통은 줄었들었으나 없어지지는 않았고 걷는 자세는 계속 엉거주춤했다. 그런 웃긴 모양새로 오랜만에 보는 친구에게 도넛과 커피를 사주며 웃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참고로 나는 혼자서 병원에 잘 가지 않는다. 친구들 중 일부가 실업자라는 것이 이 때는 참 감사했다. 실업자 친구들은 찾으면 언제든 볼 수 있었다. 물론 지금 이들은 더이상 실업자가 아니며 잘먹고 잘살고 있다. 이후 철봉과 웨이트트레이닝, 걷기를 통해 허리는 점차 좋아졌지만, 위 흰가운을 입은 그 사람의 말대로 지금까지도 완치는 되지 않았다. 계속 운동을 해야한다.
그렇게 일하던 중에 회사에 상당히 큰 프로젝트 하나가 들어왔고, 그 프로젝트에 작은 부분에 참여하게 되었다. 그 전까지 PHP만 주로 사용하다가 ASP.NET을 사용하여 개발하는 프로젝트였는데, 인도에 있을 때 .NET을 배웠기 때문에 몹시 반가웠다. 하지만 그 반가움은 그저 반가움일 뿐이었다. 인도에서 공부를 별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외부에서 ASP.NET을 잘 다루는 프리랜서 개발자가 와서 그 프로젝트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메인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왜 그랬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 프로젝트는 꽤나 늦게 시작되어서 일정은 촉박했다. 촉박한 일정 속에 개발자들이 모두 야근을 해서 일에 메달렸고, 나도 같이 야근을 하며 작은 일들을 도왔다. 나는 스스로 점점 작아졌다. 제대로 돕고 싶었으나 도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감일을 일주일 정도 남기고 있을 때 였던 것 같다. 도저히 상황이 좋아지지를 않아서 회사에서 아예 밤을 세워 일하기 시작했다. 그 후로 몇 일을 집에 가지 못하고 회사에서 보냈다. 군생활의 삼분의 일을 밤을 세웠다. 하지만 이 때는 군생활을 초월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군대는 합리적이지만, 세상은 돈 앞에서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고통을 느껴본 사람은 아마 세상에도 많지는 않을 것 같다.
이 시기에 정신이 온전하지 않아서 기억이 정확하지가 않다. 밤을 세워 일하던 어느 날이었다. 회사 안에 안개가 뿌옇게 낀 아침이었는데, 해당 프로젝트의 클라이언트들이 회사에 와서 클레임을 걸었다. 약속된 시간에 약속된 일이 마무리 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소리를 지르고 난리를 쳤지만, 당연히 아무런 해결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누가 시켜서 그랬는지, 혼자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곧 회사의 위층에 올라가서 있는지도 몰랐던 휴게실에서 그대로 뻗었다. 누군가가 깨워서 일어나자 오후였다. 그 날 밤에 회사에 다시 출근하기로 하고 집에 가게 되었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잠을 자고 밤에 일어나서 다시 출근을 했다. 하지만 회사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때 해당 프로젝트는 연기되었으니, 아마도 그래서 아무도 출근하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그대로 다시 퇴근을 했다.
이후 계속 해당 프로젝트의 작은 문제들을 수정하며 일을 해나갔다. 그 프로젝트 외에 다른 작은 일도 계속 들어왔으나 모두 아주 쉽게 처리하고 계속 그 프로젝트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그 한 두 페이지 정도의 페이지를 메인으로 맡게 되었는데, 문제는 심각했다. 그 프로젝트는 전체적인 웹 구조에 문제가 있었다. 맡은 페이지는 속도가 매우 느렸다. 한 페이지 로딩하는 시간이 10초가 넘게 걸렸다. 쓸 수 없는 페이지를 만든 것이다. 못 쓸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만들었다. 해결방법은 알았지만 그런 노력을 기울이기에 너무나도 많이 지쳐있었다. 그냥 바보처럼 원래의 방식대로 계속 만들었다. 결국은 내가 맡은 부분은 배제되고 나머지 중에서도 일부 부분만 오픈을 한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하는 일들은 간단한 수정이거나 이처럼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스스로 계속 작아졌고 이전 회사를 퇴사한 일을 후회했다. 참담했다.
그 이후로 시간이 약간 흘렀다. 그 프로젝트는 계속 수정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내가 맡은 부분이 별로 없다보니, 회사에서는 고생에 대한 보답으로 일주일의 휴가를 주었던 것 같다. 휴가 때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휴가를 이틀 남기고 제주도에 가는 티켓을 끊었다. 당시에 버킷 리스트 중에 “혼자 여행하기”가 있었는데 그 때가 아니면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제주도를 한바퀴 돌기로 하였다. 제 제주도에 도착하여 배낭 하나를 메고 자전거를 빌리고 첫 날 묵을 게스트하우스의 이름을 받아왔다. 나는 타고난 길치였지만, 다행히도 제주도를 도는 것은 그저 한 방향으로만 가면 되는 것이었다. 계속 한 방향으로만 돌았다. 그러다가 곧 저녁이 되고 세상은 캄캄해졌다. 전화가 왔다. 고맙게도 자전거 가게의 직원이었다. 해당 게스트하우스에 내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걱정되는 마음에 나를 찾아준 것이었다. 그가 차를 끌고 와서 나를 게스트하우스에 데려다 주었다. 게스트하우스에 도착하였고 그 곳의 다른 이들과 함께 응원하며 월드컵을 보았다. 그 날은 2010년 월드컵 16강전 우루과이전을 하던 날이었다. 경기를 보고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이유는 모르지만 평소 친하지 않았던 친구의 여자친구가 전화를 받아서 나에게 위로의 말을 했다. 나는 많은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눈물이 흐를 것 같앗다. 그냥 꾹 참으며 다 괜찮다고 되내였다. 다음 날이 되었고 나는 다른 지역에서 온 임용고시를 준비하고 있던 두 명의 남자들과 함께 하이킹을 하게 되었다. 두 번째 날부터 나머지 시간들은 그들의 일정대로, 그들의 계획대로 움직였다. 나는 성향상 혼자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지만, 그럴 수 있는 능력은 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 때부터 계속 비가 왔다. 정말 미친듯이 퍼부었다. 온 몸은 다 젖었고 나는 행복했다. 제주도의 바람은 달콤했고, 경치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다른 그 어느 곳에 있을 때보다도 좋았다. 버킷 리스트 중에 “온 몸이 젖도록 비 맞아보기”가 있었는데 그것도 이 때 “혼자 여행하기”와 동시에 이렇게 이루어졌다. 내 기록에 의하면 두 번째날 협제에서 남원까지 갔다. 중간의 재미없는 일부 구간은 트럭을 빌려탄 것 같다. 남원에 거의 도착했을 때에도 컴컴한 밤이었다. 계속 달리고 있었고 너무 치쳐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떤 작은 농작물 센터 앞에서 잠시 쉬게 되었다. 센터는 영업이 끝났고 온 세상은 어두웠고 나는 거의 쓰러져었는데 바로 뒤의 바구니 감귤 껍데기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뭔 껍데기를 여기에 버리지라고 생각하며 확인을 했는데 그건 껍데기가 아니라 생생한 감귤이었다. 그냥 먹었다. 나는 원래 귤을 좋아하지 않으나, 그 때 먹었던 감귤은 태어나서 먹은 과일 중에서도 으뜸이다. 세번째 날에도 비는 계속 내렸고 성산까지 갔다. 성산에는 일찍 도착하였기 때문에 밤에 함께 했던 그들과 자전거를 타고 계획되지 않은 나들이를 갔는데 그 때 호수 같은 곳에 가게 되었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올 법한 곳이었다. 바다인지 호수인지 모르는 잔잔한 물과 그 곳에 비친 달빛, 적당히 어울리게 잘 갖춰진 나무들, 거기를 한바퀴 두르고 있는 인도 등, 정말 너무나도 미치도록 아름다웠다. 이 미흡한 글쓰기 실력으로는 그 곳의 아름다움을 정확히 표현할 수가 없다. 그 이후로 제주도에 몇 번을 더 갔고, 여행 계획을 짤 때 그 곳을 찾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직도 어디인지 모른다.
마지막 날에도 계속 비가 왔다. 오전에 성산일출봉에 올랐으나 안개에 가려서 아무 것도 보지 못했다. 바로 제주공항까지 갔다. 그 날은 토요일이었는데 함께 했던 그들 중 한 명은 하루를 더 연장하여 한라산에 오르기를 희망했다. 무척 해보고 싶었으나 다 젖은 신발과 이미 빗물에 맛이 간 아이폰3GS를 보며 더 이상은 무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공항에서 그들과 헤어졌다. 공항에서 감귤초콜릿을 사려고 하는데 한 직원이 초콜릿을 보관해둘테니 어디에 가서 씻고 비행기를 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내 상태는 비 맞은 생쥐와 비슷했으며 땀 냄새도 많이 났다. 바로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목욕탕에 데려달라고 했다. 내 인생에서 마지막으로 가본 목욕탕이었다. 앞으로 갈 일이 또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목욕을 마치고 개운한 마음으로 중국집에 짜장면을 시켜먹었다. 싱글이라 엄청나게 금전적인 여유가 있었고, 엄청나게 배가 고팠음에도 불구하고 짜장면 하나만 시켜먹었다. 원래 혼자 밥도 잘 못먹는데, 무언가 더 시키는 것이 부끄러웠던 것 같다. 너무 맛있었다. 다 먹고 나니 더 먹고 싶었다. 하지만 그냥 나왔다. 정말 바보 같았다. 어쩌면 지금도 바보 같을지 모른다. 제주는 그냥 무작정 가기만 하면 제주가 반겨준다는 말이 있다. 이 때의 제주는 정말 그랬다. 함께 해준 두 명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분들 덕분에 너무나도 재미있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에 그 분들의 연락처를 적어놓은 메모들을 확인했지만 모두 훼손되어 연락할 수는 없었다. 임용고시 준비 중이었던 분들로 알고 있는데 아마 지금쯤 선생님이 되어 있겟지.
다시 회사에 복귀하여 계속해서 하던 일을 반복했다. 작은 일들과 해당 프로젝트의 수정 작업. 이 때쯤 한 친구가 용산에 새로 매장을 오픈했다. 두 명의 친구가 용산에 있었는데 한 친구는 이미 성공적으로 자리를 잡은 상황이었고, 한 친구는 이제 시작이었다. 새로 매장을 오픈한 친구는 같이 일을 할 사람이 필요했고, 또 다른 실업자 친구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어느 날은 용산의 두 친구가 와서 실업자 친구가 이 쪽으로 올 수 있게 꼬셔 달라고 말했다. 나는 실업자 친구에게 평생 빌어먹고 살 것이 아니면 지금 새로 매장을 오픈한 친구와 함께 하는 것이 옳다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정말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용산에서 용팔이가 되기는 싫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그렇게 청년 실업자였던 그를 설득하다가,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 자신을 설득하고 말았다. 내 상황은 좋지 않았다. 집은 월셋집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부모님은 천천히 늙어가고 계셨다. 개발자로서의 삶은 더이상은 꿈이 아니었고, 돈과는 좀 거리가 있는 직업으로 느껴졌다. 꿈도 아니고 돈을 버는 것도 아닌데 더이상 머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미래의 삶이 많이 걱정되었다.
용산의 두 친구를 만나서, 내가 같이 장사를 하는 것이 어떠겠냐고 물었다. 이미 자리를 잡은 친구는 재미있다고 좋아했고, 이제 매장을 오픈한 친구는 내 성격이 몹시 걱정되지만 그래도 같이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그렇게 용산에서 일하기로 결정을 하고 2010년 7월말의 어느 일요일에 혼자 마지막으로 회사에 출근했다. 나에게 맡겨진 일들을 할 수 있는 최대한 마무리 하고 사표를 올려놓은 후에 나왔다.
[사업 시즌(1) 장사의 시작 2010.08 ~ 2011.06]
2010년 8월 용산에서는 스스로 낭떨어지에 있다고 생각했다. 한 발짝만 더 뒤로 가면 인생도 끝나는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 곳은 용산의 터미널 전자상가라는 곳이었는데 하루 종일 있으면 평일에는 한 2 ~ 3팀이, 주말에는 5 ~ 6팀의 손님을 받을 수 있었다. 파는 물건은 다양했으나 방식은 간단했다. (1) 휘파리(삐끼), (2) 돌리기(판매), (3) 빠꾸처리의 과정이다. 간단하게 다음과 같다. 손님이 지나가면 무엇을 찾느냐고 묻는다. 손님은 물건A를 찾는데 가격이 어떻게 되냐고 묻는다. 물건A의 가격을 물건A의 매입가 보다도 싸게 부른다. 손님이 산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휘파리이다. 이후 판매자에게로 넘어가서 손님을 자리에 앉힌다. 손님이 찾고 있는 물건A보다 물건B가 더 좋다고 여러가지 말로 표현한다. 대체적으로 여기서 비교해주는 물건B는 물건A보다 매입가는 싸다. 물론 손님에게는 물건A보다 비싸다고 한다. 이 때 손님이 물건A를 고집하고 산다면 악세사리를 함께 팔아서 본전치기를 하거나 아니면 손실을 봐도 된다. 손님이 물건B를 산다면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여기까지가 돌리기이다. 이후 손님이 물건B를 산다고 하면 개봉 후 반품이 되지 않는다는 말과 함께 물건을 개봉해서 보여준다. 혹시 손님이 다시 와서 그 때 잘못 샀다고 반품을 해달라고 하면 개봉 후 반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이미 했다고 하며 불가능하다고 한다. 파생되는 다양한 경우가 생기지만 기본 틀은 이랬다. 용산에서 처음 배운 것이 이것이었다. 그 때의 장사 방법은 단순해서 모든 업체의 대체적인 제품들의 매입가가 똑같았고 어떤 매장이나 위의 방법을 사용했다. 참 신기한 일이다. 많은 변형이 가능하고, 보다 착한 판매는 가능하지만, 위의 내용은 매출을 일으키는 방법이고, 여기에 매입을 합치면 장사의 기본은 이것이 맞다고 생각된다. 다른 말로는 “찍고 돌리기”라고도 한다.
- “찍고 돌리기”라는 방법에 대한 극단적인 설명이다. 나빠보이는 부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방법 자체가 중요한 것이다. 위의 내용 그대로를 사용하여, 장사를 좋지 않게 하면, 장사를 절대 오래 하지 못한다.
- 여담이다. 이 다음으로 중요한 공식은 손님은 겉으로 보고 그 손님을 평가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장사를 아무리 오래 해도 겉모습만 보고 손님을 알 수는 없다. 그 외에 여러가지 재미있는 것이 많지만, 여기서는 생략.
MP3플레이어, 전자사전, 녹음기, 전화기를 팔다가 도저히 안되자 전화기와 컴퓨터까지 팔기 시작했다. 오프라인으로 오는 손님들에게 여러가지로 최선을 다해보았으나 2010년이 다 끝나갈 때까지도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오프라인 시장 자체가 죽어가고 있었고, 용산은 용팔이라는 단어와 함께 더더욱 죽어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곳곳에 계속 잘되는 곳도 있었는데 그들은 손님들에게 심하게 덤탱이를 씌우는 테크닉이 있었다.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매장세도 내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최초의 장사는 그런 식이었다. 옳음과 그름이 분간되지 않았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는 곳이었다.
여담이지만, 오프라인에서 정말 좋은 사람들, 재미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내 손금을 보고 40대에는 부동산 부자가 될 거라고 했던 손님, 가격은 상관없으니 꼭 나한테 살 거라고 말하며 내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말하는 손님, 안살 것처럼 굴다가 1시간동안 자신의 얘기를 들어주니 매우 비싼 제품을 사간 할아버지 손님 등 좋은 분들이 정말 많이 있었다.
주말까지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했고, 추석 당일과 설날 당일만 쉬며 2011년 중반까지 계속 일만 했다. 당시의 실평으로 11평 정도 되는 매장세와 관리비의 합이 400만원 정도였는데 한 달 총이익은 500만원에서 700만원정도 였다. 최초에 나는 그 곳에서 급여를 받는 직원이었는데 내 월급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날은 사장이었던 친구가 전화를 통해 자신의 어머님께 돈을 꿔달라고 하는 것을 들었다. 나에게 줄 급여가 없다고 말이다. 다소 충격적이었다. 퇴근 후에 집 근처의 뚝방길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해서 계속 고민을 했다. 그러다가 떠오른 것은 온라인이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장사가 잘 되든 아니든 이익의 30%를 달라고 하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확히는 몰라도 그것을 수락했다. 이 친구는 그렇게 나를 많이 믿어주었다. 보다 정확히는 어렸을 때부터 쭈욱 믿어줬던 것 같다.
이 때쯤 집은 다시 이사를 했다. 기존 월셋집의 집 주인에게 곧 결혼하는 자녀가 있었는데, 신혼을 보낼 곳이 없어서 그 곳에서 신혼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다. 때문에 기간이 되지 않았는데 다시 이사를 해야 했다. 다행히도 이 때 복비와 이사비는 집 주인이 냈다. 이번에는 오래된 연립주택에 월세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여전히 지하철에서는 가까웠다.
[사업 시즌(2) 온라인 판매의 시작 2011.07 ~ 2013.05]
다음 날에는 출근하자마자 친구에게 1등 온라인 중개 업체에 다녀오라고 했다. 그 친구도 바로 움직였고, 우리 회사는 성공적으로 중개 사이트에 올라갈 수 있었다. 그가 중개 업체에서 돌아오고 있는 시간에, 그 중개 업체 사이트에서 우리 제품을 가장 최저가로 만들었다. 바로 온라인에서 주문이 보였다. 매입가와 비교하여 이익이 되는 것인지 계산을 했다. 계산의 결과는 큰 손해였다. 다른 것보다도 중개 업체의 수수료가 너무 비쌌다. 풀이 죽은 채로 그 손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죄송합니다. 우리 업체는 오늘 처음 이 중개 업체에 들어왔는데, 가격을 가장 저렴하게 만들고 보니 단가가 맞지 않습니다. 취소해야 될 것 같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라고 했다. 하지만 그 뒤에는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 분은 어느 대학의 한 교수님이셨는데, 도대체 얼마를 더 주면 되겠냐고 물었다. 그래서 수수료 때문에 맞지 않는 것이니 해당 주문을 취소하고 같은 금액을 입금해주시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 분은 그렇게 해주셨고, 그 이익률은 나쁘지 않았다. 같은 돈을 따로 입금받으면 그 중개 업체의 수수료만큼의 금액이 이득이었다. 수수료율은 높았다. 이것을 시작으로 계속 이 방식으로 이 사업을 진행하기로 결심하고 계속 그렇게 했다. 이 때가 2011년 6월 중반이었는데, 2011년 9월말까지 들어오는 모든 주문자에게 전화를 걸어서 같은 말을 했다. 그 때는 그런 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 우연히 얻게 된 판매방식은 사실 그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우연은 기억하고 써먹었다.
그 시기에 자사 쇼핑몰과 장부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여러가지 이유 때문에 자사 쇼핑몰은 무료로 만들 수가 있었고, 오직 온라인으로 카드 결제를 받기 위함이었다. 장부 프로그램은 단순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아주 빠르게 만들 수 있었다. 회사는 개인사업자였지만 법인사업자처럼 운영했다. 함부로 돈을 가져가지 않고, 급여는 정해진 만큼의 액수대로만 가져갔다. 중개 업체에 카드로 결제한 손님들은 가격은 할인하여 이 쇼핑몰에서 카드로 결제하게 하고, 현금으로 결제한 손님들은 가격을 할인하여 현금으로 입금하도록 유도했다. 중개 업체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의 득이었다. 간혹 중개 업체에 올라와 있는 우리 쇼핑몰을 보고 직접 우리 쇼핑몰에서 구매하는 손님들에게는 정당한(?) 판매가 가능했다. 사후 처리를 위해 장부 프로그램에 모든 내용을 입력했다. 우리 프로그램은 우리에게 딱맞기 때문에 외주 ERP 를 사용하는 것보다 업무 효율이 높아질 수 있었다.
- 장부 프로그램은 이후에 상당히 많은 업데이트를 해야만 했고, 현재는 프로그램의 규모가 상당히 커졌다. 판매량 증가 수준을 예상하지 못해서 나중에 프로그램을 수정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다. 쇼핑몰은 4번정도 리뉴얼을 했다.
-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프로그래밍 실력이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아졌다.
2011년 9월이 끝나가는 어느 날, 중개 업체는 우리 업체와의 계약을 해지했다. 당연히 눈치를 챈 것이다. 취소율이 90%가 넘는데 눈치를 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렇게 그 중개 업체에서 짤리게 되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그 3달의 수익이 그 이후 6개월 정도 매장세와, 나와 내 친구의 월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선은 잘 알고 있었고, 그 외의 다른 방법은 알 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옳고 그름은 무엇일까? 나는 잘 모르겠다. 그냥 약한 자와 강한 자가 있고, 서로 더 벌겠다고 조심스럽게 싸우는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법과 도덕, 약속을 부르짖지만 이런 일은 결국 그냥 그런 일이다. 당시 나는 더 벌려고 했다기 보다는 살아남고자 했었다. 다시는 사용할 수 없는 방법이지만, 그 때는 그냥 그렇게 살아남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곧 매장을 옆으로 옮기게 되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당시의 자리는 매장세와 관리비의 합이 400만원이였는데 옆으로 4칸만 이동하면 200만원으로 줄기 때문이었다. 이사가 귀찮아서 자리 주인에게 이제 이 자리가 400만원짜리 자리가 아니라고 얘기를 했으나 주인은 알아듣지 못했다. 오프라인 시장이 끝났다는 것과 용산은 더 끝났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자리를 옮겼고 한 회사의 가장 큰 비용인 매장세와 관리비가 반으로 줄게 되었다. 자리를 옮기며 함께 일하던 친구와 그 때까지 벌어들인 수익을 70 : 30 으로 정산하고, 앞으로의 이익은 50 : 50으로 분배하기로 하였다. 이렇게 동업관계로 사업을 지속하게 되었다.
정확한 시기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이 맘때쯤 집도 다시 이사를 했다. 원래 살던 연립주택이 재건축될 예정이라고 했다. 이번에는 지하철에서도 멀어졌고 방도 더 작아졌다. 버스를 타고 나가야 지하철을 탈 수 있는 거리였다. 한동안은 함께 일하는 친구가 자동차로 매일같이 출퇴근시켜주었다.
중개 업체에서 나간 뒤에도 단골은 끊기지를 않았다. 3개월간 판매량이 그 전에 비해 꽤 높았기 때문에 많은 손님들이 있었고 그 손님들은 다시 전화를 걸어서 제품을 구매해주었다. 그래서 꽤 긴 시간을 버틸 수 있게 되었다.
2011년 11월부터는 블로그를 운영했다. 나는 그 당시에 블로그의 방문자수를 올리는 방법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쇼핑몰은 살아있었고, 쇼핑몰에 사람들을 유입시키기만 하면 되므로 블로그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블로그는 엄청났다. 아무도 비슷한 광고를 하지 않았다. 허허벌판이었다. 글을 쓰는대로 상위 노출이 되었고, 다양한 손님들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꾸역꾸역 이 사업을 이어갔다.
2011년 12월부터는 단골 손님과 블로그 손님이 어울어져 기존 중개 업체에 입점해있을 때와 매출/수익이 비슷해졌다. 이 때부터 새로운 멤버 2명을 추가하여 함께 일하게 되었다. 또한 새로운 사업자와 새로운 브랜드를 만들고 다시 해당 중개 업체에 다시 진입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해당 중개 업체의 입점 조건은 보다 까다로워져서 쉽게 진입할 수 없었다. 그 이후로 1년 4개월간 블로그만으로 운영하게 되었다.
2012년초의 어느 날부터는 포털사이트에서 우리 블로그의 상위노출이 중단되었다. 광고성 블로그인 것이 확연하고, 해당 포털사이트의 블로그가 아니었기 때문에 중단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다른 블로그를 개설하여 계속 운영했으나 전처럼 판매량은 올라오지 않았다. 계속 블로그를 운영하며, 오프라인에서의 외국인을 상대로 노트북을 판매하기 위해 중고 노트북을 많이 매입하여 팔아보기도 하였으나 수익이 너무 작았다.
2012년 8월에는 현재의 아내를 만났다. 아내를 두 차례 만나고 연인이 되었는데, 그 때 이런 저런 말을 아름답게 했지만, 단순하게 표현하면 나는 시간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바로 답해달라는 것이었다. 오늘 OK를 하면 내가 성공에 더 가까워질 수 있을 것이고 당신도 득을 볼 것이라고… 아내는 가끔 그 때 나의 그 태도가 참 멋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진심이었다. 나는 시간이 없었다. 다른 노력을 할 실질적인 여유가 없었다. 잘 모르는 상태에서 그런 제안을 수락해준 아내에게 언제나 감사한다. 물론 아내의 입장에서 그 날을 후회하는지 아닌지는 알 수가 없다. 그저 내가 감사하는 것 뿐이다.
2013년 1월 16일, 내 생일에는 와이프가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내한 공연을 VIP 좌석으로 예매하여 함께 보게 되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는 것이었는데 그것은 충격이었다. 뮤지컬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지만, 처음 본 뮤지컬이 <오페라의 유령> 25주년 오리지널 내한공연이라면 당연히 충격적일 것이다. 왜 이제서야 뮤지컬을 볼 수 있었나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어렸을 때 보았다면 뮤지컬 배우를 꿈꿨을 것 같다고 생각할만큼 이 공연은 완성도가 높았다. 이 때부터 뮤지컬에 깊이 빠졌다.
- 뮤지컬은 이후에 많이 봤지만, 결국 잘 알려진 뮤지컬인 <오페라의 유령>과 <노트르담드파리>가 유이한 최고였다. 뮤지컬을 보는 것은 행복한 일이었다. 뮤지컬은 평생의 취미생활이 되었다.
2013년 초에는 조금은 어설픈 다른 중개 업체를 통해 판매가 가능해보였다. 그래서 해당 사이트에 제품을 많이 올리니 다시 판매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당시의 느낌으로 그 곳은 노다지였다. 이 판로와 조금 남은 블로그의 영향력을 통해 2013년 5월까지 회사를 지속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2013년 5월부터는 이 곳에도 곧 다른 업체들이 나타나서 함께 경쟁을 하게 되었고, 블로그와 SNS를 좀 더 전문적으로 운영하는 많은 다른 업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점점 온라인에서도 설 자리가 좁아져갔다. 블로그를 통한 포털사이트내의 상위노출은 더욱 더 힘들었고, 새로운 판매경로들을 찾아내도 모두 경쟁이 치열하거나, 곧 치열해졌다.
[사업 시즌(3) 법인 설립 2013.06 ~ 2015.12]
2013년 6월에는 회사를 백화점으로 옮기게 되었다. 당시 상황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싼 자리만 찾아서 이사를 했다. 곧 새로운 사업자를 통해 다시 최초의 중개 업체에 입점하게 되었다. 이 때, 사업자를 법인으로 전환하였다. 당시에는 주식회사 타이틀을 가지고 싶었고, 중개 업체와 고객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 그렇게 진행했다.
이 때부터는 정상적인 판매를 해야했기 때문에 매입에 온 힘을 집중했다. 같은 제품을 더 싸게 사는 방법에 대해서 고민하던 어느 날, 용산에서 이미 자리를 잘 잡은 친구가 그 당시까지 연구하고 있던 새로운 매입 방식을 은밀히 말해주었다. 처음에는 장난 같았는데 그 내용은 진짜였다. 그 매입 방법은 지금까지도 이 사업의 토대가 되고 있다. 매입이 되니 한결 편해졌다.
낮은 가격에서 판매가 가능해짐에 따라, 또 중개 업체에 입점에 따라 곧 매출은 크게 증가했다. 또한 이 시기부터는 다른 류의 제품들도 판매하기 시작하여 매출은 더욱 더 증가했다. 세상에 부러운 것이 없었다. 모든 수치가 계속 오르기만 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내용은 중요한 소스가 되어 계속 사업에 잘 녹아 들어갔고, 늘 따뜻하고 즐겁기만 했다.
2014년 2월 9일에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을 했다. 결혼식은 대체적으로 돈 많이 안들이고 아내와 나의 작품으로 잘 진행한 것 같다. 다만, 이 때 사람들을 부르려고 애쓴 것이 후회가 된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들을 몇 명 부른 것 같다. 나를 모르는 부모님의 지인들도 너무 많이 왔다. 그냥 더 작게, 더 나와 아내의 결혼식답게 진행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 함께 살자고 하는 부모님의 말씀을 거절하기가 어려웠고, 와이프도 몇 년 정도는 괜찮다고 하기에 작은 빌딩 꼭대기에 있는 복층 월셋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처음에 봤을 때는 참 예쁘고 살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중에야 알았지만, 그 곳은 여름에는 덥고 겨울에는 추웠으며, 냉난방비가 70 ~ 100만원을 오가는 아주 고통스러운 곳이었다. 월세 + 냉난방비는 어마어마했다.
- 이 글에서는 결혼에 대한 이야기는 다루지 않는다. 결혼을 표현하려면 또 다른 장문의 글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2014년 6월에는 독립된 빌딩의 실평 25평 정도의 자리로 회사를 옮기게 되었다. 사람이 많아지고 여러가지 사건/사고와 일시적인 적자도 간혹 있었지만, 모든 상황은 순조러웠다. 이번 달에 못 벌면 다음 달에 벌 수 있다는 생각이 강했다. 또한 이 때부터는 주 6일제를 할 수 있었으며 회사의 인원이 10명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삶이 조금 편해졌고, 시간이 많아졌다.
2014년 11월, 그렇게 행복하게 계속 시간을 보내던 중에 <인터스텔라> 라는 영화를 보게 되었다.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이해하기 위해 <빛의 물리학>이라는 EBS다큐멘터리를 보았는데, 그 이후로 몇 달동안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과 같은 물리학에 관련된 다큐멘터리들과 과학철학 관련 내용에 푹 빠지게 되었다. 지금도 이 내용을 누군가에게 설명할 정도로 알지는 못한다. 그저 어렴풋이 현대 물리학을 알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는 이 세상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보다 더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처럼 내가 아는 것과 세상이 다른 것이 이 뿐만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계속 내가 아는 것과 실제 세상의 폭을 줄이기 위해 다양한 다큐멘터리를 보기 시작했다.
2015년이 시작되고 여전히 일에 집중을 했고, 남는 시간에 웨이트 트레이닝과 달리기 같은 운동을 했으며, 집에서는 영화와 공연 영상, 다큐멘터리를 찾아서 많이 보았다. 또 지금의 아내와 함께 이런 저런 공연장에 많이 찾아갔다. 끊임없이 듣고 보았던 것 같다.
2015년 6월부터는 지겨운 이사를 그만하기 위해서 집을 매입하기 위해 정보를 캐고 있었는데, 이 때는 “금리”라는 것에 대해 궁금하여 또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이 때는 무엇인가를 공부하려면 다큐멘터리를 봐야 하는 줄 알았었다. 결국 “금리”를 찾다가 EBS의 자본주의라는 다큐멘터리를 보게 되었다. 그것은 거대한 충격이었다. 세상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세상을 살아왔던 것 같았다. 커맨딩 하이츠, 돈의 힘 등의 경제 관련 다큐멘터리를 계속 찾아보았다. 어떻게 그 나이까지 케인즈를 모르고 살 수가 있었던 것인지… 물리학과 경제학은 중고등학교에서도 필수로 다뤄야 하고 쉽고 재미있게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공부를 안했어도 어떻게 상대성이론의 기본적인 개념을 모르고, 케인즈의 이름 자체를 모를 수가 있나? 이건 이 나라의 교육 탓이 8할 이상이다. 그렇게 집을 사기 위한 행동을 통해 경제학에 발을 담그게 되었다.
최초 사업을 시작하던 시점의 목표는 아이러니하게도 대학원에 진학하는 것이었다.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지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막연하게 공부가 계속 하고 싶었었다. 사업이 어느 정도 상승세를 타던 2015년 중반기에는 위의 이유로 경제학에 대해서 깊이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나에게는 아주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경제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 준비를 했다. 우리나라에게 야간에 다닐 수 있는 경제대학원은 두 군데 뿐이다. 그 중 이름이 더 유명한 학교에 지원했다. 서류전형과 면접을 통과하고, 합격하게 되었다. 영광스러웠고,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회사 대표는 점수를 더 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 제도 덕분에 합격이 가능했던 것 같다.
2015년 10월에는 아이가 태어났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좋은 일들만 가득했다. 가끔 아내가 결혼하고 나서 내가 운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하곤 한다. 다른 남편들은 한번씩 아내 앞에서 운다는 것이다. 사실 나도 운 적이 있는데, 2015년 12월쯤 눈이 펑펑 내리던 날에 울었었다. 세상 참 아름다운데 못 보고 살았다고 생각하며… 아무도 없는 밤에 혼자 걸으며 펑펑 내리는 눈을 보며 너무 행복하게 울었었다. 어려웠던 선택과 행동들에 대한 모든 보답을 받은 것만 같았다.
이 시기, 내 나이 34살이 되서야 나는 비로소 사람이 된 것 같다. 누가 언제 어른이 되었냐고 묻는다면, 이 때라고 할 것 같다. 이성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이 때부터 사람답게 생각하고 사람답게 행동하며 살기 시작했다.
[사업 시즌(4) 경제대학원 2016.01 ~ 2018.06]
2016년 1월부터는 경제학개론 책을 사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당시 부모님과 같이 지내다보니 육아에서는 일부 해방될 수 있었다. 한 편으로 다른 사람들과는 여러가지로 다른 삶을 살아내고 있는 아내는 힘들었을텐데, 참 잘버텨주었던 것 같다.
회사는 이미 완성된 방법론을 기반으로 계속 상승세를 그리며 거침없이 질주했다. 다만, 이 때부터 중개 업체에서의 퇴점을 고려하여 자체 브랜딩을 위해 많은 돈과 시간을 쏟아부었지만 그 일은 너무 어려웠다.
- 그 때부터 지금까지도 자체 브랜딩을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여전히 갈피를 못잡고 있다.
- 지금까지도 나에게 남겨진 거대한 숙제같이 느껴진다. 솔직히 지금의 나는 이 숙제를 풀 수 없을 것만 같다. 차차 다시 긍정적으로 꿈꿔보고 싶다.
2016년 3월에는 드디어 경제대학원에 입학했다.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토요일 오전에 학교를 가는 식이었는데 처음 한 학기는 정말 재미있었다. 1학기에 경제학 개론과 미시경제학, 거시경제학을 동시에 들었기 때문에 그랬던 것 같다. 미시경제학과 거시경제학에서 A0 이상을 받아야 졸업 시험을 안보고 졸업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몹시 긴장되기도 한 때였다. 거시경제학 교수님은 A0 이상을 많이 줘서 걱정되지 않았으나 미시경제학은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내내 미시경제학을 위주로 공부했다. 솔직히 재미있기도 했다. 그 경제학의 대가들의 생각이라는 것이 참 기똥찼고, 교수님은 유명한 경제학자였다. 경제학은 그렇게 계속 놀라웠다. 이 때 미시경제학에서만 A+ 를 받았다. 4년동안 대학에 다니며 A+는 한 과목도 없었다. 내 생에 처음으로 받은 A+ 였다. 의미가 있었다. 후에 생각해도 이 때 미시경제학에 몰입한 일은 잘한 것 같다. 전체 경제학의 기초가 미시경제학이기 때문에 다른 과목이나 다른 경제학에서도 동일한 방식의 접근을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미래의 나와 경제학이 어떤 인연이 없다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앞으로 인연이 있다면 이 때의 공부는 도움이 될 것 같다. 대학교 4학년때가 되서야 알게 된 공부하는 방법을 이 때 잘 적용했던 것 같다.
다른 한편으로는 새로운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되었다. 회사 일들 때문에 마음의 여유도 없고 내성적인 성향으로 인해 아주 가까이 지낼 수는 없었지만, 나름대로 상위 클래스의 사람들을 본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었다. 친하게 지내고 싶은 사람들이 종종 있었는데, 성격상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외에 입학 때 만난 같은 조의 사람들과는 어느정도의 친분을 유지하며 지내기 시작했다.
2016년 7월, 정신없이 한 학기가 끝나고 첫번째 여름방학이 되었다. 방학 때의 회사생활은 편하게 느껴졌다. 회사에서 하는 일은 노는 것 같았다. 회사는 곧 실평 50평 정도의 가까운 자리로 이전했다. 인원은 어느새 12명 ~ 14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고,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의 흑자를 유지하고 있었다.
2016년 8월에는 첫 자동차를 샀다. 미니 컨트리맨. 부모님과 와이프는 중고 수입차를 산다고 다 반대했지만, 그 차가 드림카였다. 그냥 샀다. 드디어 아이와 함께 자동차로 놀러다닐 수 있었고, 이후에는 남들처럼 학교에도 차로 등하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기뻤다.
- 강의실이 학교에서도 맨 꼭대기라서, 직장인이 차가 없이 다닐 수 있는 위치가 아니었다.
- 미니 컨트리맨은 지금, 와이프의 자동차가 됐다. 그녀는 처음의 의견과는 달리 즐겁게 잘타고 다닌다. 참 사랑스러운 자동차이다.
2016년 9월, 2학기가 시작되었고, 학교 생활은 서서히 재미가 없어져갔다. 원래의 성격이 이방인인데, 많은 과정을 거치며 이 때는 더 이방인의 성격이 되어 있었다. 사람들과 잘 어울어져 지낼 수는 없었다. 그저 따뜻하게 다가와주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최선을 다한 정도… 내가 스스로 약간 맛이 가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실수를 할까 두려워서 친해질 수가 없었다. 2학기에는 1학기때 못다한 거시경제학 공부를 혼자 좀 더 했고, 학교에서는 어떤 좀 다른 세계의 경제학을 하는 한 교수님의 강의를 넋놓고 보았던 것 같다. 그건 또 다른 경제학이었다. 즐겁게 그 교수님의 경제학에 대해 공부했고, 학교와는 관계없이 경제학책들을 많이 읽었다. 이 맘때쯤 아이가 자폐스펙트럼 성향이 있다는 사실을 서서히 알게 되었지만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2016년은 겨울까지 그렇게 큰 문제없이 보냈다.
- 아이는 지금도 애매한 상태인데, 이랬든 저랬든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7년이 되었고, 여전히 아무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계속 일을 하고, 공부를 했다. 아이에게는 좀 더 신경을 쓰고 주말에는 각별히 아이와 시간을 많이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어쨌거나 아이는 괜찮아질 것 같았고 모든 것은 평화로웠다.
2017년 3월, 3학기에는 졸업에 필요한 학점을 미리 확보하기 위해서 좀 더 전략적으로 화, 목, 토 풀타임으로 쉬운 과목만 수강하였는데, 실패했다. 잘못된 어려운 과목들이 많이 끼어있었다. 비용편익분석이나 환경경제학 같은 과목들은 어렵고 관심이 없는 분야였다. 억지로 학기를 진행하며, 경제학 관련 공부는 거의 혼자서 따로 진행했다. 곧 다시 여름방학이 되었다.
2017년 7월에는 회사를 마포로 옮겼다. 실평 65평 정도의 한 층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다. 사업을 시작하고부터 용산을 떠나는 것도 하나의 목표였는데 드디어 용산을 떠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뻤다. 하지만 용산에 의존하고 있는 것들이 많이 있어서 가까운 마포까지 밖에 갈 수 없었다. 8월에는 부천 옥길의 현재 살고 있는 아파트의 분양권을 매입했다. 기쁜 일이었다. 드디어 반복되는 이사를 마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주택담보대출을 축소하는 정부의 부동산 정책이 계속되고 있었다. 때문에 내가 집을 사는 것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분양권 매입을 최대한 신속하게 진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천만다행이다.
2017년 9월, 4학기가 되었고 중급거시경제, 프로그램 R, 통계학을 수강하였다. 세 과목 모두 단 하나의 목표, 논문을 위한 것이었다. 중급거시경제학은 거시경제학의 좀 더 어려운 부분을 한번 더 배우는 과목이었는데, 지금도 다시 듣고 싶은 명강의였다. 때문에 해당 교수님께 논문 지도를 요청하였다. 다시 겨울방학이 되었다.
2017년 12월, 지금 살고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당시에 비교적 돈을 많이 벌었으나, 집값의 70%와 신용대출을 추가하여 겨우 겨우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그래도 기뻤다. 드디어 원치않는 이사, 언제나 집주인에게 눈치보이는 기분, 이상하게 많이 나오는 낸낭방비와 작별한 것이다. 홀가분했다.
- 신용대출은 그 후 6개월만에 갚을 수 있었고, 70%의 대출은 집값이 오름에 따라 그 비율은 사실상 대폭 줄어들었다.
2018년 1월, 일과 육아 외에는 논문 쓰기에 집중했다. 하지만 논문은 거절되었다. 논문 주제가 다소 엉뚱해서 거절될 것을 진작 알고 있었는데도 너무 아쉬웠다. 쓰고 싶은 주제가 그것뿐이었다. 영어실력은 논문을 쉽게 볼 수 있는 수준은 아니고, 통계는 전혀 몰랐다. 거기에 경제학도 석사 수준에서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논문을 포기해야 했다. 이때 교수님께서 논문이 아닌 에세이를 쓴다면 지도를 해주겠다고 했었는데 에세이도 포기했다. 논문이 거절되니 더이상 자신감이 없었다.
- 이때 에세이마저 포기한 것을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후회하며 지내고 있다. 유능한 교수님이라서 배울 것이 많았을 텐데 정말 아쉽다.
2018년 3월 마지막 학기가 되었다. 학위 취득만 완료할 수 있도록 간단한 수업들을 수강했다. 논문은 못썼지만 석사학위는 얻게 되었다. 모든 것이 잘되어가고 있었다. 또 2018년 1분기에 우리 회사는 하늘을 날고 있었다. 17명의 인원으로 기존 대비 훨씬 높은 수준의 흑자를 달성하고 있었다. 이 때는 멤버들에게 급여를 아낌없이 지급했다. 일은 많은데 사람이 없어서 인력난이 심각했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일하기 좋은 회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다. 흐름은 영원할 것 같이 보였다. 이 때, 어린 시절의 가난을 모두 이겨낸 것이라고 생각했다. 집도 있고 차도 있고 한 회사의 대표에 좋은 사람과 결혼을 잘했고 곧 석사가 되는 상황이었다. 모든 면에서 성공적으로 느껴졌다.
-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렇게 생각하지 못한다.
- 계속 그대로 유지가 되었다면 정말 부자가 되는 것은 맞았다.
인생에서 두 번째로 행복했던 시즌이었다. 모든 일이 잘되어가는 중에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고 학위까지 딸 수 있었으니 좋았다.
- 경제학 공부는 이 이후로 지금까지 정지된 상태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일시정지 상태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다시 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
- 아래 나오는 이유들을 통해 강제적인 일시정지가 되었다.
[사업 시즌(5) 위기 2018.06 ~ 2020.08 현재]
2018년 6월부터 7월까지 약 한 달동안 곧 회사에는 세무조사가 있었다. 무엇보다도 회사의 많은 자산을 잃게 되는 것이 두려웠고, 요구하는 많은 자료들을 준비해주는 것이 힘들었다. 평생 한번 겪기 힘든 일이었는데 아마도 이 때부터 운세가 꺽여 갔던 것 같다. 세무조사 자체는 큰 문제없이 종결되었다. 많은 추징금을 내야 했으나 회사의 운영에 영향을 주는 수준은 아니었다. 세무조사가 끝나고 홀가분한 기분으로 새 자동차를 구입했다. 법인명의로 벤츠 GLC 를 구매했다. 이후로는 모든 것이 잘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2018년 9월, 온라인 중개 업체에서 퇴점 요구가 들어왔다. 기존에 나간 제품이 잘못된 것이 있었는데, 고객의 클레임이 몇 차례 반복되었다는 것이다. 상황을 보니 한 시기에 나간 제품들이 다소 비슷한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그 시기에 전체적인 제품에 문제가 있었고, 그 시기를 제외하고는 문제가 없다고 말했으나 클레임이 반복되었으니 끝이라는 내용이었다. 만나서 자세히 얘기를 해보았으나 이미 결정된 사항이라고 하였으며 어떻게 말을 해도 문제가 해결될 수 없었다. 사업자를 다시 만들어서 다시 해당 중개 업체에 입점한다고 해도 이전만큼 해당 중개 업체에 깊게 발을 넣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 중개 업체는 이미 협력사를 대폭 줄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안타까운 상황이었고, 상황은 납득이 되지만 그저 억울하기만 했다. 그래도 갑의 결정이란 바꿀 수가 없는 것이었다.
바로 다른 중개 업체들을 찾아서 입점을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모든게 끝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모든 일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리고 높은 고정비용을 줄여나갔다. 그렇게 적자폭을 줄여갈 수는 있었지만, 그럼에도 적자폭은 컸다. 주5일제로 근무를 조정하였다. 필요없어진 토요일 근무를 제외하고 전체의 급여를 낮춰갔다. 억지로 주5일제가 된 것이다. 여담이지만 처음 겪는 주5일제의 세상은 아름다웠다. 회사가 어려워서 죽을 맛이었지만, 그래도 주말은 꿀이었다. 물론 지금도 꿀이다.
2019년에는 내내 회사, 가족과 관계된 일만 했다. 다행히도 아이는 점차 좋아졌고 가정은 화목했다. 하지만 회사에서는 무슨 일은 해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2019년에는 중요 멤버들도 퇴사하게 되고 일은 점점 힘들어져갔다. 중요 멤버들의 퇴사와 함께 원래 그들이 해왔던 업무 방식을 효울적으로 바꾸어 나가며, 그 자리들을 파트타임 멤버도 교체해나갔다. 마케팅부터 포장까지 한 부분, 한 부분 다시 참여하며, 모든 부분의 작업 방식을 다 바꾸어나갔다.
2019년 9월에는 부모님이 아파트 청약에 당첨되셨다. 하지만 내가 정신이 없는 상황에서 공고를 잘못 봤다. 주소 때문에 부적격 판정이 나왔고, 1년 후부터 다시 청약이 가능하게 되었다. 그 이후로 해당 아파트의 가격은 가파르게 올랐다. 지금까지도 아쉬운 일로 남는다. 또 이맘때쯤 회사의 중심을 잡는 멤버들이 퇴사하며, 회사에서 하는 일 자체가 힘들어졌다. 내 나름대로는 이 때부터 백의종군하는 심정으로 일을 했다. 곧 대상포진에 걸리게 되었다. 이미 정신적으로 많이 지친 상황이었는데, 이 상황에 육체적으로도 힘들게 일을 해서 면역력이 약해졌었던 것 같다. 이 때는 정말 이를 악물고 했다. 모든 것이 무너지더라도 아쉬움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2019년 11월이 되서야 그동안 놓치고 있던 중요한 판매경로들을 조금씩 찾아냈다. 그 덕에 다른 회사는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시스템의 부분 부분의 작은 변화들과 이런 새로운 판매경로들을 찾아내며 회사 전체가 변화할 수 있게 되었다. 작은 변화들이 모여 큰 변화를 만든 것이다. 이 때부터 회사의 팀장급 인원들은 진짜 팀장이었다. 일의 분산이 제대로 진행되어 나는 다시 어느정도 편해질 수 있었다. 다만 나의 동업자와의 관계는 이 때 좀 멀어졌었다. 10년을 같이 일했으니 이 때서야 멀어진 것은 어쩌면 우리가 잘 한 것일지도 모른다. 잘 한 것일 것이다. 10년을 같이 했다는 것은 그냥 같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축하할 일이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 지금은 관계를 회복했으나 예전처럼 서로 친근하지는 않다. 서로에게 너무 어려운 존재가 되었다. 깊이는 있어진 것이려나… 잘 모르겠다.
2019년 12월부터는 다시 흑자를 달성할 수 있었다.
2020년은 시작과 함께 코로나19의 세상이 되었다. 새로 찾은 판매경로와 코로나19 덕분에 전자제품이 잘 팔려서 2020년 1분기에 거의 1년 반만에 흑자를 달성했다. 기적 같았다.
- 1년 반동안의 적자액은 회사의 규모에 대비해 매우 큰 액수였다. 그 이전에 흑자액을 잘 모아놨기 때문에 버틸 수 있었다. 이 부분은 정말 잘한 것이라서 이렇게 한 줄 추가.
2020년 5월부터는 역시 코로나19 때문에 다시 적자로 전환되었다. 또한 자리를 임대해주는 회사의 갑질에 의해 회사를 다시 옮겨야만 했다. 이런 형태의 갑질은 그 곳에서 처음 느껴봤다. 이런 시기에 갑질이라니… 갑이 아닌데 갑질을 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도 놀랍기만 하다.
2020년 7월에는 같은 마포의 조금 더 저렴한 실평 기준 55평대의 자리로 회사를 이전했고, 회사의 인원은 딱 10명으로 축소되었다. 2020년 8월 회사의 실제 자산은 잘되던 시절에 비해서 많이 줄어들었다. 다만 작은 상승세가 느껴진다.
2020년 8월 31일 월요일 갑자기 주문량이 상승하고 있다.
어떻게 될까? 어떻게 할까?
지난 20년을 되돌아보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은 늘 번갈아가며 나타났던 것 같다. 노력에는 보답이 있었고, 잘못된 행동을 하면 항상 대가가 따랐던 것 같다. 그중 지난 10년은 온통 돈과의 사투였던 것 같다. 돈에서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돈에 집중했다. 하지만 돈으로부터의 자유보다는 오히려 돈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아쉬운 일이다.
현재 상황은 내 인생에서 중요한 시점이다. 잘 버티고 잘 해서 이번 적자 시즌을 무사히 넘긴다면 인생은 편안해질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한다면 지금은 전혀 예상할 수 없는 다른 길을 걸어야 할 수도 있다. 내년이면 마흔 살이 된다. 지켜야 할 가족이 있다. 어쩌면 삶에 대해 비겁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예상할 수 없는 길을 걷기보다는 걸어왔던 길을 계속 걷고 싶다.
여전히 돈으로부터 자유가 첫번째 목표이다. 그래야 하고 싶은 일들을 찾아서 자유롭게 해나갈 수 있으니까… 앞으로의 시간은 지난 20년과 같이 치열하기보다는 조용히 평화로울 수 있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
한편으로는 좀 더 하고 싶은 다양한 일들을 찾아보고 진행하는 시간을 가지고 싶다. 지금처럼 회사 위주의 생활보다는 세상을 잘 이해하고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갇혀있는 느낌이 답답하다. 여러가지 상황으로 보았을 때, 공부와 운동을 지속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모든 노력 속에 운이 함께 하기를…
원본이 삭제될 경우 지원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네이버에서 우연히..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답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
더 노력하겠습니다.
-
경제학을 부전공 하고 있는 학부생입니다. 미시경제학을 잘 공부하지 못하고 산업조직론과 재정학을 공부하다 보니 기초 이론이 너무 부족하여 이리저리 검색하다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걸어오신 길에 대해 담담하게 돌아본 이런 글을 볼 수 있어 굉장히 행운이라 생각합니다. 부족하지만 부족하다는 사실을 항상 까먹는 제게 많은 영감을 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반갑습니다~^^!
이 시간에 이 정도의 열정이 있다면,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응원해주신 거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살겠습니다.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연말 잘 보내시기를…